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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일 방송

[6.25특집강좌] 4회 - 북조선이 자랑하는 “대전해방전투”의 진실은 무엇인가

방송일 : 2017-06-24  |  진행 :  |  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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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조선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전쟁과평화연구소장 최용호입니다.
오늘은 6·25전쟁 특집 네 번째 시간으로 복조선이 자랑하는 “대전해방전투”의 진실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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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 북조선군은 오산 북쪽의 죽미령에서 스미스부대를 격파하면서 미군과 최초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어 북조선군은 계속해서 천안전투에서도 미 제24사단을 격파하면서 또 다시 대승을 거두고 미 제24사단을 금강을 연결하는 계선까지 밀고 들어왔습니다.
금강방어선은 대전을 방어하기 위해 한강방어선 이후 자연적인 장애물을 이용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방어선이었습니다. 7월 12일 오후, 금강 남쪽으로 철수를 완료한 미 제24사단은 금강선 방어를 위해, 공주와 대평리에 각각 1개 연대를 배치하고, 1개 연대를 예비로 하는 방어 태세를 갖추었습니다.
7월 13일에는 금강의 교량은 물론 도선장과 나룻배까지도 모두 폭파했습니다. 그러나 사단의 방어지역은 30km나 되었으며 각 연대는 2개 대대로 감소 편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투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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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북조선군 제1군단은 대전을 차후작전의 핵심목표로 선정했습니다. 당시 대전은 인구 13만여 명의 충청남도 도청 소재지로 경부선과 호남선 철도가 통과하는 교통의 중심지이며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북조선군은 “대전에서 남조선군과 유엔군 주력을 포위 소멸한다”는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부터 유엔 항공기의 공중공격이 치열해 졌습니다. 따라서 북조선군의 상용전술은 후방침투 및 우회공격과 야간전투 위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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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을 추격해온 북조선군 제3?4사단이 금강 북쪽에 도달한 것은 7월 14일이었습니다. 제4사단이 공주에서, 제3사단이 공주의 동쪽 대평리, 즉 현재의 세종시 금남교 부근에서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제4사단은 7월 14일 아침 6시경 포격과 함께 소형 목선으로 도하해 후방의 포병대대를 공격했습니다. 후방을 공격당한 미군 제34연대는 제대로 대항도 해보지 못하고 다음날 아침 논산방향으로 철수해 버렸습니다.
공주지역의 미군이 철수하자 대평리의 미군은 측방이 노출되어 북조선군에게 포위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큰 피해를 입고 100여대의 차량을 포함한 모든 중장비를 파괴한 후에 산악 능선을 따라 유성방향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 제24사단장이 기대를 걸었던 금강 방어선마저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제 중부지역의 교통중심지로 전략적 가치가 매우 큰 대전이 북조선군의 직접적인 위협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제 대전에서 북조선군을 막아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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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제24사단장 딘 중장은 금강선이 붕괴되자, 대전에서 북조선군의 공격을 최대한 저지하기로 했습니다. 딘 중장 공주에서 논산을 경유하여 대전으로 철수한 제34연대에게 대전 방어임무를 부여했습니다. 또한 북조선군의 우회공격을 우려하여 제21연대를 대전 동측방 마달령에 배치했으며 전투력이 약화된 제19연대를 영동으로 이동시켰습니다.
대전 방어를 위해 배치된 제34연대의 책임지역은 갑천 일대만 하더라도 정면이 10km가 넘었습니다. 따라서 병력이 적은 1개 연대로 대전과 같은 대도시를 방어한다는 계획 자체가 무리였습니다. 사단장 역시 제34연대가 대전을 지켜낼 수 있다고 보지는 않았습니다. 후속부대의 전개와 북조선군의 공격 기세를 약화시키기 위한 지연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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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남조선군과 유엔군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고 있던 북조선군 땅크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지 않고서는 결코 북조선군을 막아낼 수 없었습니다. 그때까지 미군에게 지급되어 있던 유용한 반땅크 무기는 75mm무반동총과 2.36″로켓포였습니다. 그러나 이들 무기는 T-34땅크를 관통할 수 없었습니다.
그 결과 미군 부대 역시 남조선군과 마찬가지로 땅크를 앞세워 돌진하는 북조선군의 공격에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맥아더 사령부는 7월 3일 본국에서 3.5″로켓포를 보급해 줄 것을 긴급 요청했습니다.
다행히도 3.5″로켓포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연구가 시작되어 6?25전쟁 발발 직전에 개발이 완료되어 대량생산체제에 들어갔습니다. 신무기인 3.5″로켓포는 7월 8일에 교관단과 함께 캘리포니아를 출발해 7월 10일 대전에 도착했습니다. 제24사단은 7월 12일에 예하 부대에 지급하고 교육을 시작함으로써 대전 전투에서 최초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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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을 공격하는 북조선군 제1군단은 모두 3개 사단을 투입했습니다.
제4사단을 공주-논산 방향으로, 제3사단을 대평리-신탄진 방향으로 공격시켜 대전을 정면공격하고
제2사단을 진천-청주 방향에서 대전 동측방으로 우회 기동시켜 대전의 후방을 차단함으로써 제24사단을 대전에서 포위 격멸하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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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장으로부터 대전 방어임무를 부여받은 미 제34연대장은 대전 외곽의 갑천을 따라 부대를 배치했습니다.
북조선군의 공격은 7월 19일 아침에 야크기 6대로 영동철교와 대전비행장 일대를 공격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갑천변에서의 공방전은 하루 종일 계속되었습니다. 방어선의 곳곳이 돌파되고 땅크가 밀려왔습니다.
다급해진 연대장은 자신이 직접 3.5″로켓반을 이끌고 북조선군의 땅크에 접근하여 사격을 했습니다. 땅크는 단 한발에 불타버렸습니다. 그때까지 남조선군과 미군을 괴롭히던 북조선군의 땅크를 상대할 수 있는 매우 효과적인 무기가 생긴 것입니다.
그 사이 논산에서 대전 서측으로 공격하는 북조선군의 일부가 대전 남쪽 보문산으로 진출하여 금산 도로와 옥천으로 연결되는 대전터널을 차단했습니다. 또다시 방어부대의 후방이 차단된 것입니다. 1개 연대 병력으로 대전을 방어한다는 것은 최초부터 무리였습니다.
결국 전방이 돌파되고 후방이 차단된 연대는 소부대 단위로 분산되어 차량 등 중장비를 파괴한 후에 산길을 따라서 금산 및 옥천 방향으로 철수했습니다. 이로써 중부지역의 전략적 요충지인 대전은 7월 20일에 북조선군의 수중에 들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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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전투를 현장에서 지휘했던 사단장 일행은 소규모의 지휘부와 함께 옥천 도로를 따라 남진했습니다. 그러나 금산방향의 도로로 잘못 진입하면서 도로를 차단하고 있던 북조선군의 사격을 받아 분산되었습니다. 소수로 분산된 사단장 일행은 보문산으로 피신했습니다.
사단장은 보문산에서 야간에 부상병에게 줄 물을 구하던 중 낭떠러지로 떨어져 실신했습니다. 그때부터 실종된 사단장은 36일 동안 산야를 헤매다가 전라북도 진안에서 북조선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금강 및 대전전투에서 미 제24단은 2천여 명의 인원손실과 함께 장비의 대부분을 잃고 전투력이 상실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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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전투에 이르기까지 북조선군의 야간전투 및 후방차단전투는 위력을 발휘하며 미군을 궁지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때 마다 포위된 미군은 중장비를 모두 파괴하고 분산되어 철수하기에 바빴습니다.
유엔군은 낙동강 방어선으로 철수하여 인천상륙작전을 준비하게 됩니다. 대전해방전투는 분명 북조선군의 빛나는 승리의 전투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술적인 승리였습니다.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에 의해 모든 것이 역전되고 말았으니까요.
다음시간에 계속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전쟁과평화연구소장 최용호였습니다.


입력 : 2017-06-23 (조회 : 141)  |  북한개혁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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