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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우세스쿠 특집방송: 차우세스쿠는 왜 총살되었나

방송일 : 2019-12-24  |  진행 :  |  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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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조선 인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인민의 안녕과 나라의 발전을 위한 조선개혁방송입니다. 오늘 시간에는 김일성의 의형제였던 니꼴라에 차우세스쿠의 독재를 붕괴시킨 로므니아 혁명 29주년을 맞으며 특집방송을 준비했습니다.
오늘 시간에는 로므니아의 차우세스꾸의 독재와 혁명이 일어나게 된 동기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1989년 12월 25일, 로므니아의 대통령이였던 니꼴라이 차우쉐스꾸가 부인과 함께 공개총살을 당했습니다. 당시 니꼴라이 차우세스꾸는 사형선고를 받은 뒤 5분만에 총살당했는데 당시 그의 총살 집행을 자원해 나선 사람만 3백명이 넘었습니다.
총살형을 선고하기 바쁘기 자동보총 총탄의 세례를 받은 차우세스꾸와 그의 부인은 허름한 담벼락 밑에 쓰러졌습니다. 그와 그의 부인의 몸에 박힌 총알만 무려 120발이 넘었고 총살당하는 장면은 텔레비죤을 통해 전 세계로 실황중계 되었습니다. 24년간 가혹한 독재정치의 끝의 결말은 바로 공개총살이었습니다.
니꼴라이 차우쉐스꾸의 독재통치는 특징은 중국의 모택동의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 김일성의 유일독재 체계를 따라했다는데 있습니다.
로므니아의 인민혁명으로 붕괴되어 챠우세스쿠의 공개총살로 모습을 보고  김일성과 김정일은 크게 긴장했습니다. 당시 김정일은 로므니아의 차우쉐스꾸의 재판과 공개총살 장면을 보면서 5분 넘도록 아무런 말도 못하고 앉아있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니꼴라이 차우쉐스꾸는 김일성 주석과 긴밀한 친분을 유지하던 사이었으며, 북조선에서 일어나는 김씨가문의 독재세습을 보고 그대로 따라하다가 인민혁명에 의해 총살되었기 때문입니다.
최근 북조선 현실은 어떠합니까? 김정일이 죽고 김정은위원장이 북조선의 지도자가 되었지만 최근의 북조선 현실은 차우세스쿠의 총살당시 로므니아의 모습과 크게 다른 것 같지 않습니다. 로므니아의 대통령이였던 니꼴라이 차우세스꾸의 독재 통치 24년은 북조선 3대세습독재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습니다.
우선 로므니아의 니꼴라이 차우쉐스꾸는 20세기 후반기에 세계 사회주의 국가들 중에서 가장 악랄한 독재자들을 자신의 본보기로 삼았습니다. 1971년에 중국과 북조선을 방문한 니꼴라이 차우쉐스꾸는 중국의 모택동과 북조선의 김일성의 독재통치에 깊은 감동을 받고 그대로 따라했습니다.
자신은 종신 대통령으로 만들고 김일성의 주석궁전을 보고 무려 80억딸라를 들여서 수도 부끄레스띠에 1만7천개의 방으로 구성된 궁전을 지었습니다. 수도 부끄레스띠에 건설된 차우쉐스꾸 궁전은 세계에서 가장 큰 미국의 국방부 건물인 펜타콘 다음으로 큰 건물이였습니다.
차우세스꾸는 또한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세습독재 통치 체제를 완성한 것을 보고 아주 부러워하면서 자신도 그대로 따라했습니다. 니꼴라이 차우세스꾸는 자신의 부인인 엘레나 차우쉐스꾸를 제1부총리로 임명하고 매부와 며느리까지 포함해 가족친척 40명을 고위직책에 임명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2천여명의 양아들을 만들어 이들에게 국가의 핵심 요직들을 안겨주었으며 자신의 아들은 후계자로 지명하였습니다. 김일성이 제 아들 김정일을 후계자로 만든 것을 보고 그대로 따라하였는데 선전선동도 북조선의 모든 것을 완전히 그대로 따라한 것입니다.
니꼴라이 차우쉐스꾸는 자신의 생일뿐만 아니라 부인 엘레나의 생일도 국가적 명절로 만들었습니다. 로므니아의 방송에서는 “열정적이고 영명하신 영원한 우리의 지도자”라는 북조선 식 칭송 표현이 매일같이 흘러나왔습니다.
여기에다가 차우쉐스꾸는 북조선의 국가보위부와 같은 기관인 로므니아의 셰쿠리타테를 강화시키고 4명당 1명을 감시자로 만들었습니다. 당시 로므니아에서 사람들을 감시하고 체포하고 처형하는 셰쿠리타테와 경찰 등의 권력기관에서 일했던 사람들은 70여만명이나 되었습니다 .
북조선만큼이나 인민들을 치밀하고 가혹한 감시와 통제, 처벌을 하면서 니꼴라이 차우쉐스꾸와 그의 가족을 위한 독재통치를 해왔던 것입니다. 경제분야에서도 차우쉐스꾸의 정책과 실천은 김일성, 김정일과 거의 비슷하게 하다보니 경제를 망치고 결국에는 인민대중의 봉기를 불러왔습니다.
차우쉐스꾸는 외국의 차관을 도입하여 원유화학공업의 발전을 비롯한 중공업 발전을 우선시 하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중공업 발전을 우선 하는 정책은 초기에는 성과가 있었으나 1970년대 초 세계적인 원유위기로 대외채무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밎더미에 올라앉았습니다.
1970년대 말에 로므니아의 원유자원이 급속히 줄어들고 외국에 백10억딸라의 빚을 갚지 못하자 로므니아 경제는 심각한 위기를 맞았습니다. 1985년부터 로므니아 경제는 미누스 성장을 하게 되면서 빚이 늘어나자 차우쉐스꾸는 로므니아에서 생산되는 모든 것을 수출하도록 했습니다.
로므니아에서 생산되는 모든 것을 수출하여 빚을 갚으라는 차우세스꾸의 명령은 인민들의 생활에 결정적 타격이 되었습니다. 현재 북조선에서 경제가 지속적인 대북제재에 의해 붕괴되어 인민들이 산과 들과 바다에서 나는 좋다는 모든 것은 다 수출해서 독재유지에 쓰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다보니 로므니아 인민들은 가난과 굶주림, 감시와 통제, 처벌로 말할 수 없이 비참하고 고통스런 생활을 하여야 했습니다. 이 때문에 1980년대 후반부터 로므니아에서는 분노한 인민들의 차우쉐스꾸 반대 투쟁이 조직화, 대중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침내 1987년 트란실바니아 지방의 브라쇼트시에서는 2만 명의 노동자가 로임과 생활조건 보장을 요구하며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차우쉐스꾸는 인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독재를 중단하고 개혁과 개방을 할 대신 더욱 가혹한 독재통치를 펼쳤습니다.
결국 1987년부터 차우쉐스꾸의 독재를 반대하는 반체제 단체들의 활동이 본격화되면서 인민혁명의 조건이 성숙되기 시작했습니다. 1988년 로므니아 공산당 내부에 ‘구국전선’이라는 개혁세력이 결성되였으며 1989년 10월의 반정부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였습니다.
1989년 11월 차우쉐스꾸가 6번째로 공산당 총비서로 선출되면서 분노한 인민들이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벌렸고 여기에 군대가 동참했습니다. 사태가 악화되자 차우쉐스꾸는 외국방문에서 돌아왔으나 혁명을 일으킨 인민과 군대, 국가기관에 의해 체포되어 공개 총살되었습니다.
북조선 청취자 여러분, 로므니아의 니꼴라이 차우쉐스꾸가 공개처형을 당한 것은 인민의 의사를 거역하고 독재를 한 필연적인 결과라는 점을 잘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1989년 로므니아 인민혁명의 교훈이라는 주제로 진행하겠습니다.
청취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입력 : 2019-12-24 (조회 : 61)  |  북한개혁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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