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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일 방송

[6.25특집강좌] 3회 - 유엔군이 6.25전쟁에 참전하게 된 원인과 과정

방송일 : 2017-06-22  |  진행 :  |  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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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전쟁과평화연구소장 최용호입니다.
오늘은 6·25전쟁 특집 세 번째 시간으로 유엔군이 6·25전쟁에 참전하게 된 경위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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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반도에서 전쟁이 발생했다는 소식이 미국에 최초로 전해진 것은 인민군의 공격이 시작된 지 7시간 후인 6월 25일 11시 04분 UP통신의 특종 보도였습니다. 이어 무쵸 주한 미 대사가 보낸 정식보고서가 미국의 국무성에 도착했습니다.
그때 워싱턴의 시간은 토요일 밤 9시 26분이었습니다.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고향인 미주리주 별장에서 가족들과 토요일 오후의 휴일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워싱턴까지는 비행기로 3시간이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조선반도의 전쟁을 보고 받은 트루먼 대통령은 제일 먼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하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리고 워싱턴으로 돌아갈 비행기를 준비하도록 지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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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비행기에 오른 트루먼은 워싱턴으로 귀환하는 3시간 동안 조선반도의 전쟁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대해 골똘히 구상했습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북한의 전면남침은 소련이 미국에 대해 시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의 침략을 방치한다면 공산당의 마수는 아시아 전역으로 퍼지게 될 것이다. 결국엔 제3차 세계대전으로 연결될 것이다. 따라서 대한민국을 지켜내는데 미국이 적극 나서야 한다.”라는 결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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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내에서 이루어진 트루먼 대통령의 결심 예상 밖이었습니다. 당시 남조선에 남아 있는 미군은 500명 정도의 군사고문단뿐이었습니다. 주력은 1949년 6월 30일까지 모두 철수했습니다. 그리고 여섯 달 전인 1월 12일, 애치슨 국무장관이 유엔의 연설에서 미국의 태평양방위선에서 대한민국과 대만은 포함되지 않는다고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대통령의 결심이 바뀐 이유가 궁금할 만도 했지요. 그러나 누구도 질문을 하지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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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먼 대통령의 의중을 확인한 미국의 합동참모본부는 맥아더 극동군사령관에게 제한적 군사조치를 시달했습니다. 그리고 백악관으로 귀환한 대통령의 사후 승인을 받았습니다.
그 내용은
첫째, 조선의 전쟁상황 파악을 위해 조사반을 파견한다.
둘째, 미국인의 철수를 위해 해?공군을 지원한다.
셋째, 남조선군의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탄약을 제공한다. 등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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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일본을 지배하고 있던 미국의 극동군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남조선에 거주하고 있던 미국인들의 철수를 위해 6월 26일 새벽 1시부터 미군의 해군과 공군을 동원해 29일까지 전원을 일본으로 철수시켰습니다.
그때 서울 상공에 출현한 북조선 YAK기를 미국 공군이 격추해 실질적인 교전사태가 발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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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7일 11시 북조선군이 의정부를 점령한 후 서울을 향해 진격을 계속하고 있을 때 미국의 백악관에서 제2차 안보회의가 열렸습니다. 그때 해군과 공군의 참전을 결정하고 트루먼 대통령의 성명으로 언론에 발표했습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지상군 참전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지상군 참전에 관한 판단은 맥아더 원수에게 맡겨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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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9일, 맥아더는 전선시찰을 위해 일본의 하네다 공항을 출발해 수원비행장에 내려 이승만 대통령의 영접을 받았습니다. 그때는 서울이 점령된 후였습니다. 국군이 한강 방어선에 배치되고 있었습니다. 
그는 지프차를 타고 포탄이 떨어지는 길을 달려 영등포의 한강방어선에 도착했습니다. 방어선을 둘러본 맥아더는 “지상군 투입이 필수적이다”라는 결심을 굳히고, 일본으로 돌아 갔습니다.
그는 6월 30일 새벽 03시 트루먼 대통령에게 지상군 파병을 건의했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2시간 후인 5시에 맥아더의 건의를 승인했습니다.
대통령의 승인 즉시 맥아더는 일본의 맨 남쪽 큐슈섬에 주둔하고 있던 미 제24사단에게 출동명령을 내렸습니다. 1개 대대를 특수임무부대로 편성해 최단시간 내에 파병하라고 지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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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6월 26일 04시 뉴욕에서는 트루먼 미국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긴급회의가 열렸습니다. 이때 대한민국의 주미대사 장면이 회의에 참가해 위급한 상황을 호소했습니다.
영국, 프랑스, 인도 등 9개국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긴급회의는 미국이 제안한 “북조선군의 적대행위 즉각 중지와 38선 북쪽으로 복귀 요구, 이를 시행하기 위한 회원 각국의 협조 및 북조선에 대한 원조 금지에 대한 결의문”을 채택했습니다.
 이어 6월 28일 열린 제2차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표결을 통해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회원국들에게 “남조선을 도와 무력공격을 격퇴할 것을 권고”하는 결의안을 채택했습니다.

2차례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정에 따라 회원국가로부터 지원된 병력으로 유엔군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7월 7일 개최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는 유엔군사령부 설치에 대한 결의안을 채택했습니다. 이로써 유엔 역사상 최초로 유엔군사령부가 창설되었습니다.
유엔군사령관의 선임과 지휘는 미국의 대통령에게 위임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트루먼 대통령은 극동군사령관 맥아더 원수를 초대 유엔군사령관으로 임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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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맥아더 원수의 명령에 따라 일본 큐슈에서 한가롭게 지내고 있던 미 제24사단 제21연대 제1대대 스미스 중령의 부대가 7월 1일 부산에 상륙했습니다. 그때부터 전쟁은 한·미 연합군과 북조선군의 전쟁으로 바뀌었습니다.
미군들의 자부심은 대단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한 그들은 동양의 약소국 북조선 정도는 우습게보았습니다. 미군이 참전한 사실만 알게 되어도 황급히 물러 갈 것으로 생각하고 전쟁준비도 소홀히 했습니다.
실제로 전쟁준비를 제대로 할 틈도 없었습니다. 일본에서 여유롭게 즐기고 있던 그들이 갑작스럽게 맥아더의 명령을 받고 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부산에 상륙해 대전을 거쳐 오산으로 이동한 후 죽미령 고개에 배치된 것입니다.
스미스부대가 북조선군과 최초로 접촉한 것은 7월 5일 아침 7시 30분이었습니다. 허둥지둥 진지편성을 마치자 말자, 북조선군과 맞닥뜨린 것입니다. 북조선군은 8대의 땅크를 앞세워 공격해오고 있었습니다.
스미스 부대는 접근해 오는 땅크를 기다리고 있다가 사격하기에 가장 좋은 지점에서 75밀리 무반동총을 발사해 명중시켰습니다. 그러나 땅크는 잠시 멈칫했을 뿐 계속 전진하고 있었습니다. 대대를 직접 지원하는 제52야포대대에 요청해 포병화력으로 사격을 계속했습니다. 그래도 땅크는 전혀 개의치 않고 전전을 계속했습니다.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미군을 보기만 해도 물러갈 것으로 생각했던 북조선군의 땅크는 미군의 포탄을 정면으로 맞은 후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공격을 계속합니다. 괴물이었습니다. 괴물의 출현으로 스미스 부대의 진지에는 공포감이 엄습했습니다. 땅크가 나타나면서 승패는 끝나버렸습니다.
뒤따라온 북조선 부대들은 스미스 부대와 지원하는 포병부대 진지를 짓밟으며, 공격을 계속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스미스 부대는 440명 중 150여명이 전사하거나 행방불명되었습니다. 스미스 부대를 지원하는 제52포병대대는 모든 화포를 잃었으며, 131명 중 31명이 전사하거나 행방불명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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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의 악전고투는 계속됐습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전쟁과평화연구소장 최용호였습니다.

입력 : 2017-06-22 (조회 : 123)  |  북한개혁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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