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후원안내

자유게시판

Home > RADIO >특집방송 > 기념일 방송

기념일 방송

[6.25특집강좌] 2회 - 6.25전쟁 결정 과정에서 스딸린과 모택동은 어떤 역할을 했나.

방송일 : 2017-06-21  |  진행 :  |  시간 :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하기
0:00:00

 

북한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전쟁과평화연구소장 최용호입니다.
오늘은 6·25전쟁 특집 두 번째 시간으로 스딸린과 모택동의 역할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6·25전쟁의 주모자는 스딸린이었다는 것이 정설이었습니다. 겨울에도 얼지 않은 항구 즉 부동항이 필요했던 스딸린이 김일성을 사주해 6·25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1994년 7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영삼 대통령에게 러시아의 엘친 대통령이 6·25전쟁과 관련된 극비문서를 넘겨주면서 6·25전쟁 발발 과정에 관한 진실이 만천하에 들어났습니다.
새로운 진실은 6·25전쟁을 김일성이 주도했고, 스딸린과 모택동이 지원했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 김일성과 스딸린, 모택동 세 사람의 삼각 협력관계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

1945년 조선반도가 일제의 식민지배에서 해방된 후부터 스딸린과 김일성은 조선반도 전체를 공산화 통일해야 된다는 점에 대해 생각을 같이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노련한 정치가인 스딸린은 미국과 대결하게 되는 상황을 두려워했습니다.
반면 세상물정 잘 모르는 젊은 혈기의 정치가 김일성은 1949년부터 “무력으로 조선반도를 통일해야 한다.”라는 결심을 굳혔습니다. 그렇지만 무력통일을 위한 전쟁은 김일성의 능력으로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스딸린의 승인과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김일성과 박헌영은 1949년 3월 5일 비밀리에 모스크바를 방문해 스딸린에게 ‘조선반도 무력통일 방안’을 정식으로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스딸린은 “남한이 북침을 해올 경우에 한해 반격할 수 있다”라고 못 박았습니다.
당시에는 이승만 등 남한의 지도자들이 공공연하게 ‘북진통일 주장’을 제기해 남한에 의한 북침이 곧 발생할 것처럼 우려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러나 남한의 북진통일 주장은 남조선 국민들의 사기를 올리기 위한 허풍일 뿐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

기다리다 지친 김일성은 38도선 일대에서 전쟁과 같은 규모의 침범을 계속했습니다. 1949년 5월의 개성 송악산전투, 8월의 옹진 은파산전투 등이 그때 있었던 전투였습니다.
스딸린은 미국의 개입을 크게 우려해 김일성의 38도선 침범을 통제했습니다. 그는 북조선 주재 소련대사 쉬띄코프에게 김일성의 침범을 통제하지 못한다고 힐책했습니다. 그때 스딸린이 대사를 힐책하며, 김일성을 설득하라고 보낸 십여 차례의 전문이 엘친 문서에서 확인되었습니다.
==================

한편 스딸린은 김일성을 설득하기 위해 대규모 군사원조를 제공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T-34땅크입니다. T-34땅크는 제2차 세계 대전에 사용하던 장비를 개량해 앞부분의 철갑을 두껍게 개량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T-34땅크는 무적의 괴물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미국에도 T-34땅크를 정면에서 파괴할 수 있는 반전차무기가 없었습니다. 스딸린으로부터 T-34땅크를 200여대나 지원받은 김일성은 우리는 무적의 무기를 가졌다면 자랑했다고 합니다. 자신감에 넘친 김일성은 남침을 승인해 달라고 계속해서 스딸린을 졸랐습니다.
그러자 스딸린은 조선반도의 무력통일을 위해서는 중국의 지원이 필수적이라며 김일성에게 마오쩌둥과 협조하도록 권유했습니다. 스딸린의 권유가 아니더라도 김일성은 모택동이 중국의 동북지방을 평정하는 단계에서 많은 도움을 제공하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모택동이 김일성을 도울 차례였습니다.
김일성은 측근인 김일을 모택동에게 보내 조선족 2개 사단을 북조선군으로 편입하는 문제를 마무리 짓고 조선반도 무력통일을 위한 조·소·중 3개국 협력체제를 구축했습니다.
=================

해가 바뀌어 1950년 1월이 되면서 스딸린의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그해 1월 12일 미국의 애치슨 국무장관이 유엔의 연설에서 조선반도와 대만은 미국의 태평양방위선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발표한 것입니다.
미국의 태평양방위선이 알류샨열도와 일본열도 필리핀열도를 포함하는 선이라고 발표한 것입니다. 물론 소련을 의식해 미국의 영역을 최소화해 발표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스딸린과 김일성이 생각할 때는 유사시 조선반도의 전쟁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해석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스딸린은 김일성이 계속 요구해온 면담 요청을 수락했습니다. 그때가 1950년 1월 말이었습니다. 김일성은 북한주재 소련대사 쉬띠코프의 주선으로 박헌영을 대동하고 그해 3월 30일 모스크바를 방문했습니다.
그때부터 김일성은 4월 25일까지 한 달 가까이 모스크바에서 보냈습니다. 그때 김일성과 박헌영은 스딸린과 세 번을 만나 조선반도 문제를 토의했습니다. 이때도 스딸린은 미국의 개입 가능성을 우려했습니다. 김일성은 3일 만에 남조선을 점령할 것이며, 미국은 개입할 시간이 없다고 장담했습니다.
스딸린은 김일성을 믿었습니다. 김일성의 무력통일을 지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스딸린은 여전히 미국의 개입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딸린은 “일단 전쟁이 시작되면 적군이 정신을 차릴 여유가 없도록 사정없이 몰아 붙여야 한다.”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첫 번째 시간에서 말씀드렸던 내용 즉 북조선군이 서울에서 3일 동안 정지해 있었던 것은 김일성이 스딸린의 지침을 어긴 것이었으며, 그것이 남조선군에는 행운이었던 것입니다.
그때 스딸린이 강조한 것이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스딸린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돌아가서 모택동을 만나 이 문제를 꼭 협의하시오. 만약 당신이 강력한 저항에 부딪친다면 나는 전혀 당신을 도울 수가 없소. 그러니 가능한 모든 도움을 모택동에게 요청하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스딸린의 지침은 명확했습니다. 미군이 개입할 경우 소련은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명확히 한 것입니다.
===============

김일성은 스딸린의 지침에 따라 5월 13일 북경을 방문해 다음날 모택동을 만났습니다. 모택동에게 스딸린과 만나 조선전쟁에 합의했다는 사실을 말하자 모택동은 깜짝 놀랐습니다.
모택동은 대만해방을 위해 군대를 복건성에 집결해 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선전쟁이 발생한다면 대만해방 전쟁을 포기해야하기 때문입니다. 모택동은 북경주재 소련 대사를 불러 스딸린으로부터 직접 설명을 듣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스딸린의 전문은 그날 모택동에게 전달되었습니다. 그때 두 사람이 주고받은 전문의 사본을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스딸린의 전문을 확인한 모택동은 5월 15일부터 김일성과 구체적으로 전쟁계획을 논의하기 시작했습니다.
===================

북한으로 돌아온 김일성은 소련 군사고문단의 지도를 받아 남침계획을 완성했습니다. 남침 날짜는 장마철이 되기 전인 6월로 잡았습니다. 그리고 기습을 고려해 일요일인 25일을 공격 날짜로 잡았습니다.
그런데 모택동에게는 공격날짜를 알려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중에게 알게 된 모택동이 매우 서운해 했다는 후문이 남아 있습니다.
결국 동족간의 전쟁인 6·25전쟁은 김일성 주연, 스딸린과 모택동이 조연으로 만들어진 작품인 것입니다.
북한동포 여러분 이제 력사적 진실을 이해하시게 되었나요?
이제 력사적 진실을 확인하게 되시면서 전쟁의 도발 책임이라든지 나머지 구체적인 문제들은 제가 답변 드리지 않아도 동포 여러분께서 잘 알게 되셨으리라 믿습니다.
그럼 다음 시간에 계속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전쟁과평화연구소장 최용호였습니다.

입력 : 2017-06-21 (조회 : 90)  |  북한개혁방송
Copyright ⓒ 북한개혁방송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