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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일 방송

[6.25특집강좌] 1회- 1950년 6월 25일, 38선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나?

방송일 : 2017-06-21  |  진행 :  |  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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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전쟁과평화연구소장 최용호입니다.
올해는 우리민족 분단력사에서 가장 큰 인적, 물질적, 정신적 피해를 낸 6.25전쟁 65주년입니다. 북조선에서는 6.25전쟁이 남조선이 북조선을 침략한 전쟁으로 정의의 전쟁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는 력사적 진실과 완전히 다릅니다.
그리하여 6.25전쟁 67주년을 맞으며 6.25전쟁의 진실을 알아보기로 합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 “1950년 6월 25일 38도선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라는 주제로 말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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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67년 전인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38도선 일대에는 동해바다를 통과하고 있던 태풍 ‘엘시’의 영향으로 가랑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습니다.
38도선을 경계하고 있던 남조선군의 병영은 소수의 경계병을 제외하고 대부분 깊은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나마 병영에 남아 잠을 자고 있는 병력은 평소의 절반 정도에 불과 했습니다.
남조선군 총참모장 채병덕 소장이 토요일이었던6월 24일을 기해 그동안 계속되어 오던 비상경계령을 해제했기 때문입니다. 그때가 농번기 철이라 농촌에는 일손이 부족했습니다. 많은 장병이 농촌의 일손을 돕기 위해 그 동안 미루어 두었던 휴가와 외출 및 외박을 얻어 고향을 향했습니다.
채병덕 총참모장은 서울 용산에 장교구락부를 지었습니다. 준공식 날짜가 바로 비상경계령이 해제된 날인 6월 24일 토요일 밤이었습니다. 그는 준공식 파티를 위해 사단장급 고위 직위자들을 모두 서울로 불러 들였습니다. 그들은 새벽녘까지 땐스파티를 즐겼습니다. 술에 취한 그들은 6월 25일 아침까지 깊은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전쟁이 벌어진 후 사람들은 채병덕 총참모장이 비상경계령을 해제한 것은 장교구락부 준공식 파티를 열기 위해서였다고 채병덕을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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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채병덕 남조선군 총참모장이 장교구락부 준공식을 생각하고 있을 때인 1950년 6월 20일 경부터 북조선군은 훈련을 명목으로 38선으로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중국으로부터 북조선군에게 전환된 정예의 조선족 2개 사단과 소련이 지원한 최신형 T-34땅크 200여대도 그때 38도선으로 이동했습니다.
북조선의 10개 보병사단과 200여대의 땅크, 2천5문의 화포, 11척의 함정, 226대의 항공기 등이 지상과 바다, 공중에서 남조선을 공격할 만반의 채비를 갖추었습니다. 드디어 6월 25일 새벽 4시경 38도선 북쪽에 배치된 북조선 부대들에게 ‘폭풍’이라는 암호가 하달되면서 2천5여문 화포의 포구가 38도선 남쪽을 향해 일제히 불을 내뿜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동족간의 전쟁인 6·25전쟁은 막이 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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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조선군은 최단시간 내에 서울을 점령하려 했습니다. 이를 위해 남조선 제7사단이 방어하고 있는 동두천-포천 방향에 북조선 제3사단과 제4사단, 그리고 땅크 80여대를 투입했습니다. 이어 남조선 제1사단이 방어하고 있는 문산-행주 방향에 북조선 제1사단과 땅크 30여대를 투입해 서울을 직접 공격하게 했습니다.
이어 개성에서 한강을 건너 김포반도 방향으로 북조선 제6사단과 13대의 땅크를 투입해 서울의 서쪽 후방을 차단하게 하고, 남조선 제6사단이 방어하고 있는 춘천-홍천 방향에 북조선 제2사단과 제12사단, 그리고 모터사이클연대를 투입해 서울의 동쪽 후방을 차단하게 했습니다. 동해안에서는 북조선 제5사단, 제766유격연대, 제945육전대가 공격하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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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시작되자 남조선 군대는 북조선 군대의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그렇잖아도 많은 병력이 휴가와 외출 외박을 나간데다가 최신형 무기인 T-34땅크를 막아낼 무기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남조선군대도 반땅크무기인 2.36인치 바주카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주카포를 끌고 나와 T-34땅크를 향해 발사했습니다. 바주카포가 T-34땅크를 정통으로 명중시켰지만 T-34땅크는 끄떡도 하지 않았습니다. 남조선 군대는 단번에 공포의 도가니에 빠져 버렸습니다.
남조선군 총참모장 채병덕 소장은 북조선군의 공격이 시작된 지 2시간이 지난 아침 6시에야 북조선군의 남침사실을 보고 받았습니다. 그가 술에 취에 깊은 잠에 빠져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신성모 국방부장관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장관은 전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장관은 일요일에는 전화를 받지 않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채병덕 소장은 장관 비서와 함께 장관 숙소로 찾아 북조선군의 남침 사실을 보고 했습니다.
대통령 이승만은 25일 아침 10시경 창경궁 비원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청와대 경비대장 김장흥 총경이 달려와 북조선군의 남침사실을 보거했습니다. 대통령은 낚시를 던져둔 채 급히 청와대 집무실로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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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가 급격히 악화되자 채병덕 총참모장은 서울근교에 있는 부대는 물론 대전, 광주, 대구에 배치된 부대들까지 모두 서울 북쪽으로 이동해 서울을 방어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긴급명령을 받은 부대들은 전투준비도 갖추지 못한 채, 심지어 탄약이나 식량도 없이 중대나 대대 단위로 열차에 탑승해 서울로 이동했습니다.
그들은 서울에 도착한 즉시 북조선군을 향해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반땅크무기가 없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고양이 앞에 던져진 쥐와 같은 형국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부대들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북조선군의 일격에 무너져 버렸습니다.
전쟁 하루만인 6월 26일 오후 1시에는 서울의 관문인 의정부가 북조선군에게 점령되었습니다. 그러나 남조선군 총참모장 채병덕은 남조선 국회에 나가 후방에서 지원된 병력이 반격을 가하고 있으니, 곧 북한군을 물리치고 북진을 시작할 것이라고 허풍을 쳤습니다.
신문에서는 “옹진반도의 국군이 반격을 시작해 해주를 점령했다.”는 오보를 내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이미 옹진반도의 국군이 북조선군에게 무너져 일부는 해군함정으로, 일부는 민간 어선을 이용해 철수한 뒤였습니다.
북조선군이 서울을 향해 공격해 오자 이승만 대통령은 6월 27일 새벽 3시, 서울역에서 열차를 타고 대구로 피란했습니다. 서울 시민들은 대통령의 피란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채병덕 총참모장은 계속해서 국군이 북한군을 물리치고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서울 시민은 안심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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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조선군의 공격은 거침이 없었습니다. 북조선군이 서울방어를 위한 남조선군의 최후방어선인 미아리고개를 넘은 것은 6월 28일 새벽 1시경이었습니다. 남침을 시작한지 3일이 채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북조선군의 땅크가 미아리고개를 넘었다는 보고를 받은 채병덕 총참모장은 한강교를 모두 폭파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날 새벽 2시 30분 한강 철교와 한강대교가 폭파되었습니다. 한강대교의 다리위에는 철수하고 있던 800여명의 시민과 차량이 있었는데 그들도 함께 폭파되었습니다.
그때 남조선군은 대부분 한강 북쪽에서 철수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한강교가 폭파되자 그들은 모든 화포와 차량 등 장비를 버리고 나룻배나 수영 등으로 한강을 건넜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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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서울 시청에 인민공화국 국기를 걸었습니다. 그리고 서울에서 부대정비에 착수했습니다. 그들이 다시 공격을 시작한 것은 7월 1일 부터였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남조선군이 한강 남쪽에 방어선을 점령한 후였습니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 10만여 명이었던 남조선군 중 한강은 건넌 병력은 2만여 명에 불과 했습니다. 그들은 한강교가 폭파되면서 모든 장비를 한강 북쪽에 버리고 맨 몸으로 한강을 건넜기 때문에 그들이 가진 것은 겨우 소총뿐이었습니다.
그들은 밤을 새워 부대를 재편성해 한강방어선을 점령했습니다. 그리고 7월 3일까지 북조선군의 한강도하를 6일 동안이나 저지했습니다. 실로 기적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바로 유엔군참전의 계기가 된 한강방어전투입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전쟁과평화연구소장 최용호였습니다.

입력 : 2017-06-21 (조회 : 51)  |  북한개혁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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