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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일 방송

9.9절 특집방송: 1회 쏘련군정이 북조선 림시정부를 수립했다

방송일 : 2019-09-09  |  진행 :  |  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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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올해 9월 9일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71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조선개혁방송은 공화국 창건 71돐을 맞아 쏘련과 중국이 공개한 력사적 자료들과 사실을 토대로 북조선 정부 수립의 진실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첫 번째 시간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전에 수립됐던 북조선림시정부는 쏘련군정에 의해 수립되였다는데 대해 말씀드립니다.
올해에도 9월 9일을 맞으며 조선중앙방송과 로동신문, 텔레비죤에서는 김일성 주석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고 할 것입니다. 김일성이 조선해방 진공작전을 진두에서 지휘해 북조선을 해방시켰고 북조선에 림시정부를 수립했고 1948년에 정부를 수립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고 8.15해방 후 북조선에 수립된 북조선림시정부는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였습니다. 그런데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항복한 이후 북조선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김일성의 항일유격대가 아니라 쏘련군대였습니다.
김일성 혁명력사에서는 1939년 소할바령 회의 이후로 소부대공작으로 전환했다는 식으로 선전합니다. 하지만 당시 김일성은 소부대공작활동이 아니라 관동군의 토벌을 견디지 못하고 1940년 10월에 쏘련으로 들어갑니다.
이듬해인 1941년에 김일성과 김정숙 사이에서 태여난 아들이 바로 김정일로 당시 이름은 소련식으로 유라였습니다. 쓰딸린의 명령에 의해 조선인들과 중국인들로 구성된 쏘련군 제88정찰려단 1대대 대대장에 임명된 김일성은 대위였습니다.
쏘련 극동군 제88정찰려단장은 김일성 회고록에도 나오는 중국 사람인 주보중이였는데 쏘련군의 명령과 지시를 받아 활동했습니다. 김일성이 속한 제88려단의 목적은 1945년 8월 24일, 려단장 주보중 대좌가 소련 극동군 와실리옙스끼 총사령관에게 보낸 긴급 보고서에 잘 나타납니다.
주보중 려단장은 "제게 위임된 제88 정찰여단은 1942년 6월 스탈린 동지의 직접 지시에 따라 창설됐습니다. 중국 동지들 대부분은 만주에서 일본 강점자들에 맞서 빨치산 운동에 참가한 지도자들입니다. 여단은 이들 지역에서 군사·정치 전문가를 양성하고 있습니다."라고 보고했습니다.
쏘련은 1945년 8월 6일 미국이 일본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자 쏘련은 8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조선과 만주를 공격합니다. 쏘련군대는 8월 11일 나진을 공격하기 시작해 8월 18일에서 22일까지 공격을 펼쳐, 원산, 함흥, 라진항을 점령했습니다.
쏘련군이 남진하여 8월 24일에는 평양, 28일에는 신의주에 진주했습니다. 평양시를 점령한 쏘련 극동방면군 제25군으로 사령관 치스쨔꼬브 대장은 8월 25일 ‘북조선 주둔 최고사령부’를 설치하고 포고문을 발표했습니다.
이때 수립된 쏘련군정 통치는 1945년 8월부터 북조선 정부가 수립된 1948년 12월까지 실시됐습니다. 원래 1945년 8월 평양에는 쏘련군이 진주한 8월 24일보다 일주일이나 앞선 8월 17일에 이미 평양건국준비위원회가 수립돼 있었습니다.
당시 국내에서 유명한 독립운동가였던 조만식이 위원장으로 하는 20여명의 민족주의독립운동가들이 ‘평양건국준비위원회’ 위원이였습니다. 하지만 러시아 극동지역에 있던 김일성은 9월 19일에야 소련 군함 ‘푸카조프’호를 타고 다른 70여명의 조선사람들과 함께 원산항으로 귀국했습니다.
1945년 5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쓰탈린은 곧바로 극동군 정치부와 체까에 38도선 이북의 지도자감을 찾으라고 지시했습니다. 쏘련군 극동군 총사령관 와실리옙스끼 원수의 부관을 지낸 꼬바렌꼬는 “김일성이 북조선에 귀국하기 보름전인 1945년 9월 초순 쓰탈린이 김일성을 비밀리에 모스크바로 불러 크렘린궁과 별장에서 단독으로 만나 그를 북조선의 최고 지도자 후보로 정한 후 그를 믿고 평양에 보낸 것입니다”고 증언했습니다.
1993년 3월 26일 남조선 김영삼 대통령이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보리스 엘친 대통령의 소련정부는 수많은 조선관련 극비문서들을 공개했습니다. 이때 공개된 극비문서에는 1945년 9월 20일 스딸린이 와실리옙스끼 극동전선총사령관에게 보낸 명령서가 있는데 북조선 점령에 관한 7개 항목이 있었습니다.
명령서에는 북조선에 소베트 정권을 설립하지 말 것, 부르죠아 민주정권 형식의 정부를 수립할 것, 북조선 인민에게 소련군정은 일본을 내쫒기 위해 진주한 것, 쏘련군정이 북조선을 보호하는 것 등 이었습니다.
1945년 10월 14일 김일성이 공설운동장에서 개선연설을 하게 된 것도 쏘련군정의 치밀한 계획에 의한 것입니다. 평양공설운동장 환영연설 바로 이틀 전인 1945년 10월 12일 소련군정 최고 사령관 치스챠꼬브는 포고문을 공표하였습니다.
치스챠꼬브가 공표한 포고문에는 “붉은 군대는 무슨 목적으로 조선에 왔는가”라는 제목의 게시문 형태로 발표되였고 이어서 소련 군정인 제25군 사령관의 명령서 제7호도 발표되였습니다.
명령서 7호에는 북조선에서 8.15 이후에 수립된 각 정당 단체들은 지방자치기관과 소련군정 경무국에 정관과 명단을 등록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또한 무장부대는 해체하고 무기를 바칠 것도 요구하는 등 완전한 군정체제로 돌입했습니다.
이처럼 쏘련군정의 치밀하고도 철저한 계획과 준비가 끝나고 10월 14일 김일성이 개선연설을 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북조선 지도자로 내세워졌습니다. 당시 공설운동장 주석단에는 소련군정 사령관을 비롯해 소련군 장령들이 참석했고 조선 국기인 태극기와 쏘련 깃발이 설치됐습니다.
쏘련군정이 김일성을 적극적으로 내세웠지만 평양에서는 김일성 중심의 정부수립 활동이 힘을 쓰지 못했습니다. 평양에서는 10월 8일 각당, 각정파들이 모여 ‘이북 5도 임시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28일에는 ‘북조선 5도 행정국’을 설치했습니다.
쏘련군정은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는 정부수립작업을 주도적으로 펼쳤고 조만식을 비롯한 국내파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지도자들을 탄압했습니다. 그리하여 1945년 11월 북조선인민회의를 구성하고 1946년 2월 8일 제1차 회의를 열고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를 출범시켰습니다.
쏘련군정에 의해 만들어진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는 위원장에 김일성, 부위원장을 김책과 홍기주였고 22명의 위원으로 구성되였습니다. 당시 김일성 항일빨찌산 세력이 너무나 작고 정부수립에 대한 전문성이 없어서 쓰딸린은 쏘련에서 살던 조선사람들을 대규모로 파견했습니다.
쏘련공산당과 행정기관, 군대와 공장, 기업소, 문화, 예술 등 쏘련의 각 분야에서 활동하던 간부들과 전문가들을 조선으로 파견한 것입니다. 바로 이들이 김일성을 도와서 림시정부를 만들고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따라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수립의 전단계인 림시정부는 쏘련군정에 의해 수립되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해방후 평양의 정치정세와 김일성의 반대파 숙청과정 등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조선개혁방송에 김승철이었습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입력 : 2019-09-09 (조회 : 83)  |  북한개혁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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