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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일 방송

9.9절 특집: 2회 신탁통치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수립

방송일 : 2018-09-08  |  진행 :  |  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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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올해는 북조선 정부 수립 7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조선개혁방송은 중국과 쏘련의 자료와 력사적 사실을 토대로 북조선 정부 수립에 관한 특집을 마련했습니다.
오늘 두 번째 시간에는 신탁통치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수립에 대해 알아봅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다시말해 지금의 북조선 정부는 김일성 주석이 수립한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김일성 주석이 일제를 타도하고 북조선에서 림시정부를 수립하고 토지개혁과 산업국유화 등으로 새로운 정부를 수립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쏘련군정 통치의 절대적 도움으로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를 설립했던 김일성이 독자적으로 정부수립을 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1946년 2월 9일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를 수립한 이후 2년 후인 1948년 9월 9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가 수립됐습니다.
이 기간동안에 북과 남은 쏘련과 미국의 군정통치를 받았는데 북조선과 남조선은 초기에는 통일정부를 세우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3.8선으로 북과 남이 분단된 것이 제2차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연합국들의 결정으로 만들어진 것이여서 쉽지 않았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은 쏘련에 막대한 군사, 경제적 지원을 주고 연합국으로 같이 나치독일을 반대해 싸웠지만 체제가 달랐습니다. 쏘련과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마자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국가로서 서로 반대의 길을 가게 되었고 모든 면에서 대립이 격화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인 쏘련과 미국은 전후 세계질서 수립에서도 대립하게 되는데 그 첫 번째가 바로 3.8선의 확정이였습니다. 3.8선의 확정과 함께 결정된 또 하나의 문제는 조선을 신탁통치한다는 것입니다.
일제의 패망을 계기로 조선의 독립이 결정되면서 조선은 자체적인 나라 운영능력이 없다고 보고 신탁통치를 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이런 결정은 1945년 7월 22일 독일 베를린 시외의 포츠담에서 열린 미국(트루먼), 영국(처칠), 소련(스탈린) 등 3국 정상회담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다음날인 7월 23일 발표된 ‘포츠담 선언’은 “조선이 적당한 시기에 독립되어야 한다”는 ‘카이로 선언’의 내용을 재확인했습니다. 이후 8월 14일 미국은 38도선을 경계로 북에는 쏘련이 남에는 미국이 진주하는 계획을 쏘련측에 전달했고 다음날 쏘련은 미국 제의를 승인했습니다.
3.8선이 생겨나고 몇 달 지난 1945년 12월 16일부터 25일까지 모스크바에서는 미국, 영국, 쏘련의 외무상 회의가 열렸습니다. 모스크바 3상 회의라고 불리우는 이 회의에서 합의되어 27일 발표된 것이 바로 미국과 쏘련이 공동위원회를 설치하고 조선을 신탁통치를 한다는 것입니다.
신탁통치의 핵심은 쏘련과 미국이 북과 남을 분리해서 통치한다는 것으로 신탁통치가 되면 조선은 자주독립국가가 될 수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북조선과 남조선 모두에서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운동이 격렬하게 벌어졌습니다.
북과 남의 민족주의자든, 공산주의자든 모두가 일제 식민지에서 해방되어 자주독립국가를 열망했기 때문에 신탁통치를 반대했습니다.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 산하의 지방 군당 조직들에서도 신탁통치 반대 주장이 나왔습니다.
조선공산당 총비서였던 박헌영은 신탁통치가 발표된 바로 그날 새벽 38선을 넘어 북조선으로 들어왔습니다. 박헌영이 없는 서울에서는 조선공산당 핵심간부들도 신탁통치를 반대했습니다.
그런데 비밀리에 평양에 들어갔다가 5일만인 1946년 1월 2일 서울로 돌아온 박헌영은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쪽으로 돌아섰습니다. 서울의 조선공산당은 “신탁통치는 일제의 침략과는 다른 것”이라며 “민족이 통일하여 5년이라는 기간을 단축하자”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미국측과 맞서면서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려 했던 남조선은 신탁통치 반대로 더욱 들끓었습니다. 상해림시정부를 이끌었던 민족주의지도자 김구가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이끌었고 1946년 1월에는 리승만도 함께 했습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서 쏘련과 미국은 북과 남을 맡아서 통치한다는 신탁통치 기간은 최고 5년으로 정했습니다. 이 때문에 북과 남에서는 일제히 “또 5년간 남의 노예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라며 격렬한 반대운동을 벌렸지만 공산당은 “쏘련은 후견제”라며 찬성했습니다.
후견제란 능력이나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에 뒤를 돌보아 준다는 것인데 표현이 다를뿐 내용은 같은 것이였습니다. 미국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신탁통치 반대투쟁이 격렬하게 벌어진 남조선과 달리 김일성은 모스크바의 지시에 따라 신탁통치를 무조건 찬성했던 것입니다.
평양에서 신탁통치를 가장 견결하게 반대한 것은 북조선에서 가장 인기있는 민족주의 지도자 조만식이였습니다. 쏘련 군정사령관 치스쨔꼬브는 신탁통치 5년 동안이 조선을 독립국가로 만들어준다며 찬성을 강요했습니다.
하지만 조만식은 신탁이든 후견이든 다 같고 같은 것이라며 결사반대했고 김일성은 조만식에게 신탁통치에 찬성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쏘련군정은 조만식에게 신탁통치를 찬성하면 김일성을 군대 사령관, 조만식을 초대 북조선 대통령으로 모시겠다고 제의했으나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쏘련이 신탁통치를 강요한 것은 북조선에 괴뢰정부를 세워 통치하기 쉽기 때문이였습니다. 미국이 군정통치하는 남조선에서는 신탁통치 반대투쟁이 격렬하게 벌어졌지만 쏘련군정 통치하의 북조선은 온통 찬성분위기였습니다.
당시 김일성은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조만식을 죽여버리자고 쏘련군정에 제기하기도 했을 정도로 적극적이였습니다. 1946년에 들어서면서 쏘련군정은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조만식을 체포하여 호텔에 감금했습니다.
신탁통치에 대한 립장이 달랐던 미국과 쏘련은 갈등이 심화되었고 1947년 5월 21일을 끝으로 쏘미 공동위원회는 끝나고 말았습니다. 이후 남조선에서는 1948년 5월10일부터 5.10일까지 유엔의 감시하에 총선거를 실시하여 리승만을 대통령으로 하는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합니다.
남조선의 정부수립을 지켜보던 쏘련군정과 김일성은 3개월이 지난 1948년 8월 25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실시합니다. 이렇게 하여 9월 9일에 김일성을 수상으로 하는 조선민주주의공화국이 수립됐습니다.
이처럼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한 이후 조선은 쏘련과 미국에 의해 분단되었고 북조선은 철저한 쏘련군정의 통치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쓰딸린에게 시험까지 쳐서 충성심을 인정받아 합격된 김일성이 쏘련군정의 지도하에 북조선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결코 김일성이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활동으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수립한 것이 아니였던 것입니다. 아직은 북조선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김일성과 김정일이 왜곡한 력사의 진실이 밝혀지게 될 것입니다.
이상으로 9.9절을 맞으며 정부수립 특집방송을 마칩니다.
지금까지 조선개혁방송에 경덕현이었습니다.
입력 : 2018-09-07 (조회 : 64)  |  북한개혁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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