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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일 방송

김일성 생일특집 : 1회 김일성주석이 북조선 지도자가 되기까지

방송일 : 2018-04-13  |  진행 :  |  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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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조선인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인민의 안녕과 나라의 발전을 위한 조선개혁방송입니다. 김일성 생일 4월 15일을 맞으며 마련한 특집 첫 번째 시간으로 김일성 주석이 북조선의 지도자가 되기까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990년대 초까지, 더 멀게는 1970년대와 80년대에는 김일성 주석은 북조선 인민의 정신과 현실에서 모든 것을 지배했었습니다. 특히나 김정일 위원장이 김일성 주석을 우상화하면서 김일성주의는 1970년대와 80년대에 북조선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모두 지배했었습니다.
김일성 주석이 있었기 때문에 일제 식민지 통치에서 해방됐고, 김일성 주석이 있었기 때문에 잘 살게 됐고, 김일성 주석 때문에 조선의 미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을 때 우리인민들은 하염없이 눈물흘리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김일성 주석이 사망한지 25년째인 오늘날 조선에서는 김일성주석이라는 사람에 대한 기억은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력사와 교과서와 학습에서만 존재할뿐이고 민족최대의 명절이라는 4.15도 이제는 그렇고 그런 명절 중의 하나, 부식물도 제대로 주지 않는 명절이 됐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가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바로 김일성 주석은 세상에서 유일한 위대한 수령이 아니고 국가의 지도자는 김일성 가문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북조선의 수령론은 완전한 허구,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김일성이 북조선 지도자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보아도 김일성 수령론의 허구성을 알 수 있습니다. 김일성 주석이 일제를 타도한 것이 아니라 미국이 일본을 항복시켰고 북조선 정부 수립도 김일성이 한 것이 아니라 쏘련군정이 했습니다.
1945년 8월 6일 미국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는데도 항복하지 않자 9일에는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했습니다. 쏘련도 9일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150만명의 병력으로 만주와 조선으로 진격하게 되자 일본 군부는 다음날인 10일 항복을 결정합니다.
쏘련은 1945년 8월 17일 웅기, 나진, 청진항을 점령하였고 24일에는 평양에 진주했지만 이때까지도 김일성은 쏘련 우스리스크에 있었습니다. 평양시를 점령한 쏘련 극동방면군 제25군 사령관 치스쨔꼬브 대장은 8월 25일 ‘북조선 주둔 최고사령부’를 설치하고 포고문을 발표했습니다.
쏘련군이 평양에 진주하기 일주일 전인 8월 17일 평양에서는 건국준비위원회가 수립돼 있었습니다.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은 국내에서 유명한 독립운동가였던 조만식이였고 20여명의 민족주의독립운동가들이 위원이였습니다.
쏘련대는 평양에 입성하자 군정정치를 시작했습니다. 쏘련군정은 건국준비위원회를 민족주의 지도자 16명, 공산주의 지도자 16명이 참가하는 평양인민정치위원회로 개편했습니다. 동시에 민족주의세력을 차단하기 위해 방학세를 비롯한 쏘련의 조선인 출신 군관과 간부들을 끌어왔습니다.
당시 쏘련극동군 88려단 대대장을 했던 김일성은 9월 19일에야 소련 군함 ‘푸카조프’호를 타고 원산항으로 귀국했습니다. 김일성은 조선에서 유일하게 인정받는 지도자였던 조만식을 만나자 “선생님, 김일성입니다.”라고 하면서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렸습니다.
군정 초기에 조만식은 쏘련군정에 협조적이었고 쏘련군정도 조만식을 신뢰했는데 쏘련이 조선의 자원과 설비를 략탈하면서 사이가 틀어졌습니다. 정치적으로도 자주를 강조하는 민족주의 립장이였던 조만식은 공산주의적인 쏘련군정과 정치적으로 대립이 심해졌습니다.
쏘련군정은 어떻게 하나 조만식을 포섭하려 했지만 조만식은 “쏘련군은 해방군인가, 점령군인가”며 조선의 정부수립에 개입하지 말 것을 주장했습니다. 쏘련군정의 군정 계획에는 민족주의를 주장하는 조만식은 제거 대상이였습니다.
김일성이 8.15 직후에 조선으로 귀국하지 못한 것은 9월 초순에 비밀리에 모스크바로 가서 쓰딸린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쓰딸린은 김일성을 군정통치 하의 북조선 최고 지도자 후보로 보고 만나본 다음에 평양으로 내보낸 것입니다”
1945년 9월 20일 스딸린이 와실리옙스끼 극동전선총사령관에게 북조선 점령에 관한 7개 항목의 명령서를 보냈습니다. 1945년 10월 14일 김일성의 평양시 공설운동장에서 개선연설을 하기 전까지 북조선 정부수립 준비는 철저하게 쏘련군정이 주도했습니다.
김일성이 평양공설운동장에서 환영연설을 하기 바로 이틀 전인 1945년 10월 12일에 소련군정 최고 사령관 치스챠꼬브는 포고문을 공표하였습니다. “붉은 군대는 무슨 목적으로 조선에 왔는가”라는 제목의 포고문에는 8.15 이후에 수립된 각 정당 단체들은 소련군정 경무국에 정관과 명단을 등록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10월 14일 김일성이 평양시 공설운동장에서 개선연설을 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33세의 젊은 김성주가 김일성 장군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습니다. 당시 원산인민위원회는 쏘련군 사령부에 전화를 걸어 “김일성 장군은 없다”고 하자 쏘련 사령부는 “김성주가 바로 김일성이다”라고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그때까지 김일성은 김성주라는 이름을 썼기 때문입니다.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는 정부수립작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조만식이 반대하자 김일성은 10월 20일 조만식을 찾아가 정당을 창건하라면서 회유했습니다. 쏘련군정은 조만식에게 새로 수립될 북조선 정부의 대통령 자리까지 제안했지만 거절하고 조선민주당을 창당하면서 독자로선으로 나갑니다.
결국 쏘련군정은 김일성과 인민위원회를 시켜 1946년 1월 조만식을 반동으로 체포하면서 민족주의 세력을 탄압합니다. 북조선에서 가장 유명하고 인정받는 민족주의 지도자였던 조만식을 제거하며서 쏘련군정이 내세운 김일성이 북조선 지도자로 되었던 것입니다.
1945년 9월초에 모스크바의 별장에서 김일성을 만나본 쓰딸린은 치스쨔꼬브 소련군정 사령관에게 “주목할 필요가 있는 사람이다. 쏘련군정은 이 사람에게 적극 협력하라”고 하면서 사실상 북조선 지도자로 결정했었습니다.
1946년 여름 쓰딸린은 김일성과 박헌영 두사람을 극비밀리에 모스크바로 불렀습니다. 두 사람을 만나본 스딸린은 김일성을 최종적으로 북조선의 지도자로 결정했는데 이것이 바로 김일성이 북조선의 지도자가 된 력사적 진실입니다.
경험과 능력이 있고 자주적이였던 박헌영 대신 쏘련군대 군관으로 충성심을 보인 김일성이 스딸린의 마음에 들어 북조선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지금 북조선 인민이 배우는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비롯한 혁명력사는 일부는 맞지만 대부분이 조작과 거짓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김일성 가문의 북조선 세습독재가 73년이나 이어져 오면서 국가는 파산상태이고 인민들은 가난과 고통으로 힘들게 살고 있습니다. 이제는 자신의 능력으로 지도력을 발휘하고 인정받는 새지도자가 필요합니다.
이상으로 김일성 생일특집 첫 번째 시간을 마칩니다. 다음 시간에는 김일성 주석의 정치방식과 교훈에 대해 알아봅니다. 청취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입력 : 2018-04-13 (조회 : 21)  |  북한개혁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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