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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일 방송

김정일 생일특집 : 1회 김정일의 출생과 성장과정

방송일 : 2018-02-12  |  진행 :  |  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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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조선인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인민의 안녕과 나라의 발전을 위한 조선개혁방송입니다. 조선개혁방송은 김정일의 생일을 맞으며 특집을 마련했습니다. 오늘 첫 시간에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김정일의 출생과 성장과정은 어떠했는지를 알아봅니다. 
김일성 주석이 살아있을 때 인민들은 김일성 주석의 만수무강을 축원합니다 노래를 정말 많이 불렀습니다. 만수무강이란 만년을 살아도 수명이 끝이 없다는 말로 간단하게 말해서 만년이 넘게 살라는 축원이였습니다.
그래서인지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을 때 대부분의 인민들은 큰 사상정신적 충격을 받았습니다. 김일성 주석은 죽지 않는 사람인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김정일 시대에는 만수무강 노래는 그렇게 많이 부르지 않았습니다.
대신 김정일이 없으면 조국도 없다는 노래를 부르게 했고 결국 자신의 아들 김정은에게 절대권력을 넘겨주었습니다. 김일성 가문의 3대의 독재세습을 만들고 고난의 행군시기 3백만이 넘게 굶어죽게 만들고, 세계최악이 가난과 인권탄압을 한 사람이 김정일입니다.
김정일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요? 김정일은 어떤 사람이기에 지금과 같은 북조선을 만들어 놓을 수 있었을까요?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김정일의 출생과 성장 과정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인간은 기질이라는 본능적 성격도 있지만 인간성은 태여나서 성장하는 과정에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젊은 시절 김일성 주석은 키도 크고 잘 생겨서 여성들이 좋아하는 상이였습니다. 김일성 주석이 항일투쟁을 하던 시기에 좋아했던 여성은 1936년 5월 경 미혼진에서 피바다 연극 공연에서 갑순이 역을 하던 김혜순이였습니다.
김혜순은 당시 항일련군 전체를 통털어 가장 곱게 생긴 여성이었고 김정숙이 좋아하던 남자는 지갑룡이였습니다. 1940년 가을에 항일빨찌산은 일제의 토벌을 피해 쏘련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지갑룡과 김혜순은 사라지고 최현의 소개로 김일성과 김정숙이 결혼했습니다.
당시 김정숙은 키가 작고 얼굴이 까무잡잡해서 깜장정숙으로 불렸는데 쏘련 극동의 브야츠크에서 김일성과 생활하면서 김정일을 낳았습니다. 1945년 쏘련이 북조선을 점령하고 군정정치를 하면서 김일성을 북조선 지도자로 내세웠는데 이때부터 김일성과 김정숙 사이가 나빠졌습니다. 
당시 30대 초반의 젊은 청년으로 국가의 지도자가 된 김일성은 매일 같이 그 유명한 평양의 기생들을 끼고 밤을 즐겼습니다. 그러다보니 집에 들어가는 일이 드물었고 해방산 기슭의 김일성 집에서는 김정숙과 싸우는 소리가 자주 크게 났고 때리기도 했습니다.
키가 작고 까무잡잡한데다 고집도 센 김정숙보다는 키도 크고 잘 생긴 타자수 김성애와 바람이 난 김일성은 몇 달씩 집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1949년 김정숙은 임신을 한 상태였는데도 김일성 주석에게 노골적으로 버림받다 시피 되자 참지못한 김정숙은 쥐약을 먹고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김정숙은 병원으로 실려갔지만 깨어나지 못하고 사망했는데 이때 김정일의 나이가 9살이였습니다. 그때 부모잃은 오극렬도 김일성 주석집에서 살았는데 김정숙이 사망 후 만경대혁명학원으로 가자 김정일은 오극렬을 따라가겠다고 일주일이나 떼를 썼다고 합니다.
무척이나 외로웠던 김정일은 매일같이 같은 동네의 최현네 집에 가서 최룡해와 놀았다고 합니다. 훗날 김정일이 오극렬, 최룡해와 의형제를 무었던 것은 자신이 가장 외롭고, 서럽게 살았던 어린시절 친한 친구들이였기 때문입니다.
이붓 어머니 밑에서 이눈치 저눈치 보며 힘들고 서러운 유년시절을 보낸 김정일은 증오를 마음속에 쌓으면서 성장했습니다. 청소년기에 들어서면서 김정일은 40대의 젊은 아버지 김일성을 부축하고 신발을 신겨주는 등 아버지 눈에 들려고 무척 노력을 했습니다.
어린시절의 외로움과 눈칫밥을 먹으며 증오와 복수심을 키운 김정일이였기에 1960년대 말에 이붓어머니 김성애와 그의 아들들을 누를 수 있었습니다. 김일성의 후계자가 된 김정일은 1974년에는 로동당 조직비서가 됐고 이때부터 아버지의 권력을 빼앗기 시작했습니다.
1970년대 초부터 3대혁명소조사업을 틀어쥔 김정일은 김일성의 당을 자신의 당으로 만들었고 조선의 핵심권력을 기본적으로 가졌습니다. 로동당과 문화예술분야를 완전하게 틀어쥔 1970년대 말부터 김정일은 아버지 김일성에게 본격적으로 맞서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가 자살했다는 분노와 증오를 가슴에 품고 살아온 김정일은 1980년대에 들어와 김일성을 꼭두각시로 만들었습니다. 수령님을 모신다면서 김일성 주석에게 가는 모든 정보를 차단했고 경제가 어려워졌음에도 문화예술을 내세웠고 전국에 특각과 별장을 건설했습니다.
1980년대에 북조선 경제가 파산상태에 직면한 것은 김정일이 자신의 절대권력을 위해 모든 능력을 썼기 때문입니다. 1991년대에 김정일은 아버지로부터 최고사령관 자리까지 빼앗았고 이붓어머니 김성애는 가택연금 상태로 가두어 놓다시피 했습니다.
1994년 북남 최고위급이 성사되었을 때 김일성이 서울에 가려고 했던 것은 김정일에게서 권력을 되찾으려는 생각 때문입니다. 장편소설 영생을 보면 김일성 주석이 사망 전날 김정일과 2시간 넘게 전화통화를 했다고 하는데 최후의 부자간 싸움이였습니다.
보통 좋은 일, 기쁜 일로 전화를 하게 되면 아무리 길어도 한시간을 넘기기 어렵습니다. 두 사람이 2시간 넘게 전화를 한 것은 서울로 가겠다는 김일성 주석과 안된다는 김정일간에 격렬한 싸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김정일이 김일성 주석을 죽였다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김정일의 인간성이고 김정일이 북조선에 만들어놓은 절대권력의 본질입니다.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외롭고 서럽게 살면서 분노와 복수심을 키웠고 이붓어머니와 배다른 형을 물리치고 후계자가 됐습니다.
후계자가 되자 자신만의 절대권력을 만들어 아버지와의 전쟁을 선포했던 김정일에게는 교활하고 잔인하고 강한 것만이 필요했습니다. 김정일이 7살 나던 1947년 해방산 기슭의 자신의 집 마당의 련못에 동생이 빠졌을 때 장난삼아 동생을 물에 밀어넣은 것도 그런 리유였을 것입니다.
 
사람이 좋은 부모, 좋은 가정, 좋은 환경에서 성장하면 편안하고 열린 마음으로 세상과 사람을 대하게 됩니다. 그런데 김정일은 잘못된 만남이 된 부모와 그 부모의 갈등과 싸움, 자살로 어려운 환경에서 성장하면서 증오와 분노, 복수의 심성을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김정일 시대의 고난의 행군으로 이어졌고 세 아들 중 가장 독하고 잔인하고 집착이 강한 김정은에게 권력을 주었습니다. 김정은이 고보무와 맏형을 잔인하게 죽일 수 있었던 데에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증오와 복수의 심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김정일이 만든 3대 독재 세습과 민생고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지금까지 조선개혁방송의 김승철이였습니다.
입력 : 2018-02-12 (조회 : 317)  |  북한개혁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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