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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장벽붕괴와 독일통일 특집 4부작 (2) 동독 반체제 세력은 공산정권 붕괴에 어떤 역할을 하였는가

방송일 : 2017-11-10  |  진행 :  |  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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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북조선 인민 그리고 간부여러분.

11월 9일은 독일의 분단과 냉전의 상징이었던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날입니다. 독일 분단과 냉전의 상징이었던 베를린 장벽은 1989년 11월 9일 자유와 통일을 염원하는 동서독 주민들에 의해, 무지한 공산정권의 지도부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하여 조선개혁방송은 독일 베를린 장벽 붕괴의 의의와 독일통일, 통일독일의 발전된 모습 등을 주제로 특집방송을 준비했습니다.

오늘은 그 두 번째 시간으로 “동독 반체제 세력은 공산정권 붕괴에 어떤 역할을 하였는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남북조선과 동서독의 공통점은 냉전의 산물로 분단이 되었다는 것, 외부에 의해 분단되었다는 것이 있습니다. 이에 반해 가장 큰 차이는 동서독 간에는 전쟁이 없었지만 북과 남 간에는 전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차이는 동독 주민들은 동유럽 국가를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었고, 서독에 대한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었지만 북조선은 폐쇄된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사실 동독 주민들이 외부세계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사실이 긍정적인 통일 기초를 닦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동독 주민들은 서독의 상황이나 경제력이 어떤지, 만약 통일이 되면 어떤 운명이 닥칠지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통일 됐을 때 충격을 받지 않을 정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요즘 북조선에서 남조선 영화, 드라마 등 한류열풍, 즉 황색바람으로 북조선에서 선전하는 남조선 괴뢰정권, 미제 빨갱이라는 말은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자유의 희망을 품고 남조선행을 택한 많은 탈북자들이 남조선에 와서 고생하는 이유는 반세기 넘도록 북과 남 사이의 교류협력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교류협력 단절로 한번도 겪어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잘못 알고 있던 남조선 정보에 때문에 문화적 충격이 배로 다가와 탈북자들에게 큰 어려움으로 다가서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북조선 사람들의 미래일지도 모릅니다. 매일같이 싸우고 갈등이 생겨나 결국 또다른 분단이 되어 제 2의 이산가족이 발생할지 모릅니다.이런 북남통일의 미래를 바라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따라서 동서독의 경우처럼 인적, 물적 교류가 꾸준히 이어진다면 북조선과 남조선이 통일을 할 때 지금의 경제적 격차, 문화적 충격과 이질감은 많이 줄어들어 서로 알아가는 인적 통합까지 통일의 격차를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동독에는 있었지만 북조선에는 없는 것이 또 있습니다. 바로 반체제 세력입니다. 오늘의 핵심 주제이고 한데요, 철의 장막 베를린 장벽을 붕괴하고 동독 사회주의에서부터 벗어나 동독주민들에게 재유를, 더 나아가 동서독의 통일을 이끈 원동력이었습니다.

동독에는 기독교가 국교로 정해서 종교의 자유는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들 단체들이 교회를 중심으로 결성하여 급속한 세력 확장과 조직적 활동을 하였으며, 동독 평화혁명에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교회를 중심으로 한 동독 반체제 세력들이 공공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87년 11월에 비밀경찰에 해당하는 동독의 국가 안전국 슈타지가 지하 단체의 비밀 출판물을 찾기 위하여 베를린의 시온 교회에 있던 환경 도서관을 수색하면서였습니다.

국가 안전국의 수색 작업은 실패하였고, 이를 계기로 정부의 부당 행위를 비판하는 동조 집회가 동독 전역에서 조직되었습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서독과 동유럽에서도 수많은 집회가 열렸습니다. 이때부터 조직적인 반정부 활동이 본격화되었습니다.

동독 평화혁명 시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조직은 “신광장”과 “민주주의 지금”이라는 단체들이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동독 반체제 운동의 중심적 역할을 했던 “신광장”은 1989년 9월 13일 교회관계자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조직이며, “많은 사람들이 사회의 발전과정에 참여하고 동독 전체에 정치적 공동관장을 제공한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이 조직은 단기간 내에 급속히 확대되어 1989년 9월 25일 라이프치히에서 전국규모믜 모임을 갖고 지역별, 주제별로 결성되어 있는 전국 각지의 시민조직들의 구심점 역할을 했습니다.

“민주주의 지금”은 1989년 5월 6일 지방선거의 부정행위를 규탄하면서 9월 16일 결성되었으며, 종교인과 비판적 마르크스주의자가 연합하여 ‘권위주의 국가에서 공화제 국가로’, ‘생산수단의 국가독점에서 민영화로’, ‘환경파괴와 오염으로부터 벗어나 자연과 조화를 추구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사회민주당은 사회주의통일당의 위성정당 지도자들이 기존 체제에서 이탈하여 창설한 조직으로 1989년 10월 9일 서독사민당의 지원을 받아 결성되었으며, 동독 주민들로부터 사회주의통일당의 대안정당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1989년 10월1일에 결성된 개신교 목사, 신자, 문화인, 의사, 법률가들의 모임인 “민주혁신”은 동독의 민주화에 목표를 두었고, 1989년 9월 초 결성된 재야 사회주의 단체들의 연합체인 “뵐레너의 모임”은 동독사회의 혁신을 표방했으며, “베를리너 앙상블”은 민주화를 위한 예술, 문화인들의 모임이었습니다.

이들 조직들은 교회를 중심으로 조직을 확장하면서 동독 주민들의 시위 참여를 유도했습니다. 동독 평화혁명 과정에서 군중시위가 폭력화되지 않았던 것은 성직자들이 중심이 된 시위주도 세력들이 소련군의 개입과 사상자가 발생할 것을 우려해 폭력자제를 적극 설득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러한 동독혁명 과정에서 모든 사태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급진전되어 사전대비가 없었던 공산정권은 사태 수습은커녕 끌려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평서에는 수명 단위로 이뤄지던 주민탈출이 1989년 6월 이후 매일 2천명 규모로 늘어났습니다.

위기를 맞이한 동독 공산정권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은 유혈진압 뿐이었고 호네커 정부는 시위가 확산되자 유혈진압에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당시 독일 주변의 동유럽 공산국가에서 공산당 독재폐지, 개혁세력 집권 등 격심한 변혁을 겪었으나 동독에서의 개혁요구는 미약했습니다. 그 이유는 북조선의 국가안전보위부에 해당하는 동독 국가보안부 슈타지를 중심으로 철저한 사회감시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던 데다 동독 주둔 소련군이 최후의 버팀목이 되어 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독주민들 간에 공산 독재정권에 대한 염증이 광범위하게 퍼져있었고, 당과 정부 간부급과 그 가족들마저도 개혁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 무력진압의 성공을 확신하기 어려웠습니다.

결국 동독 공산정권은 시위대에 대한 무차별 구타와 대규모 검거가 있었을 뿐 끝내 발표명령은 내려지지 않았고 독자적 판단으로 발표명령을 내린 지휘관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동독 공산정권을 수호하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가진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동독 공산정권이 유혈진압을 하지 못한 가장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소련의 반대였습니다. 이제 동독주둔 소련군은 동독의 버팀목이 아니라 동독의 무력동원을 억제하는 요인이 되어 버린 것이었습니다.

이듬해 9월 초 동독의 라이프치히에서 수백명으로 시작된 촛불시위가 두달 만인 11월 4일 베를린 시위에 100만명이 참가하는 등 급속히 확대됐고, 9일에 베를린 장벽은 붕괴되어 동독 반체제 세력과 주민들의 평화혁명으로 동독 공산정권을 몰락시켰습니다.

동독 공산정권을 특혜를 받으며 호의호식하던 간부들도 결국 동독의 살길은 정권교체되어 서독과 통일하는 길이라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국력이 주권이라는 말처럼 국민들이 지지하지 않는 정권은 결국 몰락해버립니다.

최근 북조선에 또다시 80여명을 공개총살하는 끔직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자신의 과오를 덮기 위해 독재를 유지하기 위해 주민들에게 총부리를 겨눴습니다.

북조선에도 숨어있는 반체제 세력이 분명 존재합니다. 또한 김정은과 당의 독재와 횡포에 염증을 느끼는 간부들도 많을 것입니다. 제일 가까운 곳에서 악행을 지켜보고 있는 간부들은 지금은 웃고 있지만 결국 이 총부리가 여러분 스스로에게 겨눠 질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선군을 내세워 공포정치를 택한 젊은 지도자 김정은의 최후는 베를린 장벽과 같을 것입니다.
오늘 방송은 여기까지입니다. 다음 이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청취해주신 북조선 인민여러분 고맙습니다.

입력 : 2017-11-10 (조회 : 22)  |  북한개혁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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