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후원안내

자유게시판

Home > RADIO >특집방송 > 특집 시리즈

특집 시리즈

베를린 장벽붕괴와 독일통일 특집 4부작 (1) 베를린장벽이 붕괴되기까지

방송일 : 2017-11-09  |  진행 :  |  시간 :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하기
0:00:00

 

안녕하십니까, 북조선 인민 그리고 간부여러분.

오늘11월 9일은 독일의 분단과 냉전의 상징이었던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날입니다. 하여 조선개혁방송은 독일 베를린 장벽 붕괴의 의의와 독일통일, 통일독일의 발전된 모습 등을 주제로 특집방송을 준비했습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 “베를린 장벽이 건설되기까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독일 분단과 냉전의 상징이었던 베를린 장벽은 1989년 11월 9일 자유와 통일을 염원하는 동서독 주민들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베를린 장벽은 서독으로 탈주 혹은 이주하려는 동독인의 물결을 막기 위해 베를린에 설치되었습니다. 1961년 1월에서 8월 12일까지 동독인 15만 9753명이 서독으로 넘어왔습니다. 당시 동독주민의 인구는 1700만명정도 였습니다.

동독정부는 1961년 8월 13일 아침, 전격적으로 베를린 장벽을 쌓아갔습니다. 밤사이 동서독 베를린을 연결하는 13개의 주요도로와 80여 개의 거리에 철조망이 설치되었고, 탱크와 중무장한 경비병들이 삼엄한 경계를 서고 있는 가운데 도시가 반쪽이 난 것입니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대립의 상징인 베를린 장벽이 탄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설치 당시 동독군 장교가 철조망 경계를 뛰어넘고 있었고, 경계선 너머로 손자를 인계시키는 할머니도 있었다고 합니다.

최초에는 45km 길이의 철조망이 들어섰지만, 점차 시간이 자나면서 콘크리트와 벽돌로 된 높이 2m, 폭 2m의 장벽으로 대치되어, 150km의 차단벽은 서베를린을 고립시켰습니다.

이처럼 독일분단과 동서냉전의 상징이 된 베를린 장벽은 1989년 11월 9일까지 28년간 지속됐습니다. 이 기간 동안 동서 분계선과 베를린 장벽을 넘다가 사망한 동독주민은 천명을 넘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6.25전쟁이후부터 지금까지 남조선으로 탈북한 북조선사람들의 수가 2만 7천여명에 달하고 있습니다. 또한 아직도 중국, 태국, 러시아 등 제3국에서 갖은 고생을 하면서도 자유와 민주의 땅인 남조선으로 오려는 탈북자들이 많습니다.

동독인들도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었던 것처럼 북조선 사람들도 탈북을 하다 붙잡혀 수용소에서 갖은 고문과 짐승만도 못한 탄압을 받고 두만강과 압록가을 건너다 경비대에 총에 맞아 죽는 경우가 동독인들보다 훨씬 더 많을 것입니다. 이 세계 어느 국가에서 참아볼 수 없는 처참한 상황들이 지금 이 시간에도 북조선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이후 동독정부는 동서독 관계의 개선과 국제적 압력으로 인해 1984년부터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결정을 통해 그때까지 불허했던 서독 행 이주신청을 허락 하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많은 수의 동독인들은 공산주의체제에서 벗어나려고 이 합법적 경로를 통해 서독으로 이주하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신청자 모든 사람이 허가서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에, 불법경로를 통해 서독으로 가려는 사람도 여전히 존재하였습니다. 소위 ‘탈주자’가 되어 동서독 국경을 넘어 서독으로 가려는 것이었습니다.

198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소련을 포함하여 동구 사회주의권에 변화의 물결이 몰아쳤고, 이때를 즈음하여 동독 내에서도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기 3개월 전부터 동독은 이미 파산된 상태였습니다. ‘사회주의의 낙원’이라는 구호가 모두 허구였음이 드러난 것입니다. 이때 당시 소련을 포함하여 동구 사회주의권에 변화의 물결이 몰아쳤고 동독주민들도 경제난 악화와 개혁조치 실패에 대한 노골적인 불만이 마구 터져 나왔습니다.

1989년 5월 사회주의 진영에 속하면서 개혁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던 웽그리아가 자유주의 진영의 오스트리아와의 국경봉쇄를 해체하였고, 양국 간의 철조망을 제거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동독인들의 자유를 위한 행진은 즉시 시작되었습니다. 1989년 여름 휴가철에 동독인들은 웽그리아로 건너가 그곳의 서독 대사관에 난입하여 서독 행을 요구하였습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자유의 길을 위해 떠나려는 동독인들은 순식간에 대량으로 늘어났습니다. 서독으로 가려는 대부분의 사람은 의사, 간호사, 변호사, 기업가 등 동독의 인재자산인 ‘전문 인력’이었고 젊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동독정부는 사회주의 형제국인 웽그리아 정부에 동독인들의 탈출을 저지해달라는 부탁을 하지만, 웽그리아 정부는 동독의 거부요구를 묵살하고 동독인들의 자유를 위해 오스트리아를 거쳐 서독으로 갈 수 있게끔 철의 장막을 열어주었습니다.

사정이 이렇게 돌아가자 웽그리아로 가려는 동독인들의 대규모 행렬이 시작되었고, 불과 몇 주 만에 수 만 명이 서독으로 이주하였습니다. 웽그리아는 물론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 주재 서독 대사관에도 동독인들이 밀어닥쳤습니다.

그리고 1989년 10월 7일, 동독의 수도 동베를린에서 엄청난 규모의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수천 명이 거리로 뛰어나갔고, 짧은 시간 동안 동독 전역으로 번져나갔습니다.

시위대의 숫자는 하루하루를 지나면서 계속 늘어났습니다. 서독정부는 동독의 공안경찰들의 무력 개입과 유형사태를 걱정했지만 동독정부의 무력진압을 못했고 결국, 1989년 11월 9일 오후 9시,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었습니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사회주의체제와 자본주의체제의 대결장이었던 동서독에서 사회주의체제가 패배하는 하나의 상징적 사건으로 현대 역사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독일통일의 기회는 예상외로 빨리 찾아왔습니다. 1년 전만해도 동독과 서독 모두 통일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이 기회를 통일로 완성시킨 것은 독일인들의 저력과 독일을 둘러싼 국제 환경 변화에 있습니다.

동서독 관계는 분단이후부터 통일이 되는 그날까지 양과 질의 변동은 있었으나, 1972년 기본조약 체결 이후 지속적으로 인적·물적 교류들이 이루어졌습니다. 서독은 독일 통일 20년 전부터 동독이 인적 교류 등에 동참할 경우 경제적인 보상을 하는 방식으로 조금씩 동독의 빗장을 열었습니다.

또한 매년 20억 달러에 달하는 서독의 돈이 동독으로 건너갔습니다. 그 결과 독일 통일 직전 동독의 국민소득은 1인당 1만달러로 서독의 1/3수준까지 올라섰고, 이러한 인적·물적 교류는 독일 통일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그 다음 동서독 간에는 통일 이전에 7차례에 걸친 공식적 정상회담과 6차례의 비공식 정상 간 만남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독일통일 과정에서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두 국가 간의 교류협력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북한은 동서독과 달리 과거 서로 총부리를 겨누었으며, 전쟁 상황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한반도와 독일이 처한 상황은 다르지만, 독일 통일의 교훈은 북남통일에도 여러 가지 시사점을 줍니다.

물론 독일이 통일 과정에서 치룬 경제적 부담과 사회적 갈등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특히 서독은 통일 과정에서 천문학적인 재정적 부담을 져야 했고, 통독의 입장에서는 사회주의에서 자유민주주의로, 통제 경제에서 시장경제로 적응하는 과정에서 정치적이고 사회 심리적인 충격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독일은 오늘날, 통일의 부담과 갈등 그리고 통일 후유증을 점차 성공적으로 해서해 가며 더욱 강력한 독일을 건설하고 있습니다. 현재 국가브랜드 가치는 세계2위이고, 동독출신으로 여성 첫 총리까지 배출한 독일은 세계 강대국으로 우뚝 솟아올랐습니다.

반면 남조선과 북조선 사이에는 오르막과 내리막을 오가는 불안한 관계를 유지하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대립이 지속되고 있으며, 북조선 주민들 상당수가 김정은과 북조선 당국의 정보 차단으로 정상적인 의사표현을 하지 못하고 통제를 받고 있습니다.

동독주민들도 1936년 이후 나치와 전후 40년간 공산치하에서 살아왔지만 과거 역사적으로 자유 시민사회를 경험하였고, 또한 독제체제에서도 자유 서방과의 접촉이 쉬웠습니다. 그만큼 개방된 사회였다는 것입니다.

동독주민들은 북조선 주민보다 개방된 자유로운 시민사회와 창의적이며 자율인 자본주의 사회를 좀 더 알고 있었다는 점 등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핵과 선군정치, 그리고 독재는 북조선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것은 60년 가까이 지켜본 북조선 주민들이 더 잘 알 것입니다. 젊은 지도자 김정은은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의 독재정권지키기 답습은 그만두고 책임감있는 지도자로서 보여주기와 선전용 개혁이 아닌 주민생활에 도움을 주고 나라전체가 일어설 수 있는 지도력을 발휘해 남조선과 함께 조선반도 통일을 준비해야 합니다.

오늘 방송은 여기까지입니다. 다음이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청취해주신 북조선 인민여러분 고맙습니다.

입력 : 2017-11-09 (조회 : 4)  |  북한개혁방송
Copyright ⓒ 북한개혁방송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