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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일 방송

[조선로동당 창건의 진실 4부작] 3회 스딸린에게 인정받기 위해 싸운 김일성과 박헌영

방송일 : 2017-10-12  |  진행 :  |  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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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련군정과 쏘련군정 정치부의 확고한 주장을 받고 기세가 오른 김일성은 평양에 공산당 중앙조직을 만들고 책임비서가 되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김일성의 이러한 주장은 회의 참가자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딛쳤습니다.

오기섭을 비롯한 국내파 공산당 지도자들은 “서울에 엄연히 당 중앙이 있는데 북조선에 당중앙을 별도로 만드는 것은 분파행위”라고 반대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김일성은 오기섭 등 국내파에게 박헌영의 허락을 받자면서 주녕하와 장순명을 서울로 보내 박헌영에게 만나자고 요구합니다.
이렇게 해서 박헌영은 쏘련군의 지프를 타고 38선을 넘어 평양에 와서 10월 8일 첫 만남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 자리에는 당연히 평양의 쏘련군정의 정치담당 군관인 로마넨꼬 소장 등이 참가했습니다.

박헌영과의 첫 만남에서 김일성은 “북조선은 쏘련군정이 공산당을 주권당으로 인정하지만 남조선에서는 미국이 공산당을 탄압한다. 그러므로 남북 공산주의운동의 전반적 보조는 맞추되 당활동은 지역적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박헌영은 미국이나 쏘련 모두 민주적 국가라며 자신이 8월 20일 “현 정세와 당면과업”이라는 테제를 토대로 김일성의 주장을 거절했습니다. 이날 새벽까지 진행된 박헌영과 김일성의 논쟁과 담판에서 핵심은 공산당 중앙을 어디에 둘 것이냐 하는 것이였습니다.

김일성은 당연히 중앙의 위치는 해방지구인 북조선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박헌영은 서울이 중앙이었고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고 맞섰습니다. 두 사람의 논쟁이 끝나지 않차 로마넨꼬가 나서서 평양에 중앙을 두고 박헌영도 평양으로 올라오라고 권유했습니다.
그러나 박헌영이 거절하자 결국 평양에 분국을 설치하는 쪽으로 의견이 합의돼서 서울의 중앙에 속하되 북조선 지역의 분국설치에 합의했습니다. 결국 겉보기에는 박헌영이 이겼지만 내용적으로는 김일성이 이긴 것입니다.

박헌영은 김일성과의 첫 만남에서는 겉으로는 이기고 속으로는 졌는데 그렇다고 자신의 꿈을 포기한 것은 아니였습니다. 서울에서 미군정의 탄압을 받기 시작한 박헌영은 공개적인 활동을 크게 못했지만 당시 서울에 있던 쏘련령사관에 자주 드나들었습니다.
서울의 쏘련 령사관 부영사 샤브신은 정치담당 체까로 박헌영과 자주 만났는데 그는 박헌영을 북조선의 지도자감이라고 모스크바에 보고했습니다. 북조선에서 군정통치를 하던 쏘련 군대는 김일성을 지도자로 내세웠지만 쏘련 외무성과 체까에서는 박헌영을 지도자감으로 스딸린에게 보고했습니다.

평양의 쏘련군정에서도 박헌영이 1945년 8월 20일 발표한 “현 정세와 우리의 당면과업”이라는 소위 8월테제를 많이 참고했습니다. 이처럼 박헌영은 대중적 지지와 자질에서는 인정을 받았지만 서울의 미군정통치로 탄압받으며 어려워지는데 결정적 계기는 신탁통치입니다.
1945년 12월 말 미국과 쏘련, 영국은 조선을 신탁통치에 둔다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발표하는데 박헌영은 처음에는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쏘련군정으로부터 모든 것을 지시받고 움직이던 김일성은 처음부터 쏘련이 통치하는 신탁통치를 찬성했습니다.

평양에서 림시정부와 김일성이 신탁을 찬성하자 박헌영은 쏘련의 속셈을 알아보려고 1945년 12월 말에 평양에 들어갔습니다. 이때 박헌영은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비서로서 대우를 받은 것이 아니라 그냥 ‘박헌영동지’라는 칭호로 불리우며 랭대를 받았습니다.
김일성이 장악한 북조선 분국은 이미 북조선 중앙조직위원회로 이름까지 바꾼 상태였고 박헌영은 분국인 평양에서 재정적 지원까지 받았습니다. 이후 박헌영은 1946년 4월 초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도 만나고 쏘련군정 사령부도 방문해 고위간부들을 만났습니다.

며칠 후 있은 북조선 조직위원회 집행위원회에서 박헌영은 남조선에서 신탁통치 찬성운동을 제대로 벌리지 못했다고 비판까지 받습니다. 다시 46년 6월 말부터 7월초까지 약 2주간 평양을 방문했는데 이때에는 비밀리에 방문하는 등 박헌영은 점점 더 위기에 몰리고 있었습니다.
박헌영은 어떻게 해서든지 상황을 역전시켜 보려고 수단과 방법을 다했지만 공산당이 탄압받는 서울에서 공개활동은 거의 불가능해졌습니다. 그러던 1946년 7월말 갑자기 쓰딸린이 박헌영과 김일성을 모스크바로 보내라는 극비 지시를 내립니다.

쓰딸린이 김일성과 박헌영 모두 모스크바로 부른 것은 두 사람을 직접 만나보고 시험을 쳐서 북조선 지도자를 결정하기 위해서였습니다. 1945년 9월 초 김일성을 만나보고 지도자로 정했던 쓰딸린이 두 사람을 부른 것은 박헌영이 1946년 5월 쓰딸린에게 직접 비밀편지를 써보냈기 때문입니다.
박헌영이 로어로 써보낸 편지의 내용은 ‘김일성의 민족통일로선은 조선의 현실에 적합지 않으며, 김일성이 국내에서 활동한 공산주의자들과 중앙당을 무시하고 독자노선을 펼치면서 당을 분열시킨다’는 김일성에 대한 비판내용이였습니다. 심지어 쏘련군정이 당의 총책임자인 박헌영 자신을 따돌리고 김일성만 싸고 돈다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쓰딸린은 박헌영의 주장이 상당부분이 근거가 있다고 보고 문제를 시정할 것을 평양의 쏘련군정에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체까와 쏘련 외무성에서 제출한 박헌영의 자료들을 보고 즉시 박헌영과 김일성을 모스크바로 보내라고 지시했던 것입니다.
모스크바의 집무실에서 박헌영과 김일성을 차례로 만나본 쓰딸린은 자신이 처음에 선택했고 또 굽실거리며 말 잘듣는 김일성을 선택했습니다. 박헌영은 대중적 지지와 리론, 경험 등 자격은 충분하지만 자기 주장이 강하고 공산당 종파경험 등이 있어 쏘련의 지시를 잘 따르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이처럼 1945년과 1946년 복잡했던 해방된 조선의 정치정세하에서 박헌영과 김일성은 서로 지도자가 되려고 다투었습니다. 박헌영과 김일성의 다툼은 누가 쓰딸린에게 더 충성하는가 하는 것이 핵심이였고 여기에서 쓰딸린에게 더 잘 보인 김일성이 북조선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
이상으로 조선로동당 창건 과정에서 박헌영과 김일성의 파벌 싸움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다음시간에는 조선로동당은 창건이 아닌 합당이였다는데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이상 조선개혁방송의 김소라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입력 : 2017-10-12 (조회 : 29)  |  북한개혁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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