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후원안내

자유게시판

Home > RADIO >특집방송 > 기념일 방송

기념일 방송

[조선로동당 창건의 진실 4부작] 2회 10월 10일은 조선로동당 창건 기념일이 아니다

방송일 : 2017-10-11  |  진행 :  |  시간 :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하기
0:00:00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조선개혁방송은 공화국 창건 72주년을 맞아 조선로동당 창건의 력사적 진실을 알아보는 특집 프로그람을 준비했습니다.
오늘 두 번째 시간에는 10월 10일은 조선로동당  창건 기념일이 아니다 라는 내용을 가지고 알아봅니다.

조선로동당은 1945년 10월 10일 처음으로 창건된 당이 아니라 조선신민당과 조선공산당이 합당해서 만들어진 당입니다. 

먼저 조선공산당의 역사를 먼저 살펴보고자 합니다.
조선공산당은 일제의 식민지 통치를 받던 시기인 1925년에 창건됐으나 그후 여러차례 일제의 탄압으로 해산된 당입니다. 그러다가 1945년 8월 16일이 되어 조선공산당 재건 준비위원회가 서울에서 박헌영의 주도로 만들어졌고 8월 20일 조선공산당 재건을 선포했습니다. 이시기 북조선의 함흥과 원산, 평양 등지에 조직된 사회주의, 공산주의 혁명가들이 조직한 당은 조선공산당 지부들이였습니다.

당시 평양의 쏘련 군정을 담당했던 제25군단 사령부는 모스크바에 “공산당원이 지도자가 돼야 되지만 북조선에 들어와보니 조선공산당 지도자 박헌영은 서울에 있고 북조선에는 믿을만한 공산당원이 없다”고 보고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김일성은 한참 시간이 지난 9월 19일에야 쏘련 군함 뿌가쵸브호를 타고 원산에 도착했습니다. 김일성이 평양에 도착한 것은 9월 22일이였습니다. 인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면서 평양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쏘련군의 호위를 받으며 조용히 평양에 들어왔던 것입니다.

김일성은 9월 초에 이미 극비밀리에 모스크바로 날아가 스딸린을 만나고 북조선 지도자 후보로 선택되느라 늦은 것입니다. 당시 평양의 쏘련군정을 담당했던 쏘련 극동군 제25군단 정치위원이였던 레베데브 소장은 김일성이 귀국하기 전에 극비 명령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레베데브 소장인 1991년 남조선 중앙일보 김국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청진, 함흥 등지를 거쳐 평양에 도착한 2, 3일 후인 1945년 8월 말로 기억합니다. 직속상관인 쏘련군 극동군 제1전선군사령부 정치위원 스티꼬브 상장으로부터 긴급 전화를 받았습니다. 스티꼬브 상장은 저에게 한달쯤 후에 제88특별정찰려단의 김일성 대위를 평양에 들여보낼테니 그에게 집과 승용차, 생필품 등을 지급하라”

레베데브 소장은 일개 대위에게 집과 승용차를 지급하라는 지시를 리해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레베데브 소장은 또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첫번째 전화 지시가 떨어진지 1주일 후였습니다. 그러니까 1945년 9월 초순이지요. 역시 연해주의 스티꼬브 상장으로부터 긴급전화가 걸려왔는데 ‘김일성이 평양에 도착하면 그를 공산당에 입당시키고 쏘련군 장교로 구성된 경호원들을 붙일 것, 그리고 비밀리에 지방을 돌아보게 하고 각계층의 유명인사들을 만날 수 있도록 하라’는 내용이였습니다.”

레베데브 소장이 스티꼬브 상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것은 바로 김일성이 모스크바에서 스딸린을 만난 직후였습니다. 이때 이미 평양에는 쏘련군대에서 복무하던 조선인 출신 쏘련 군관들과 간부 선발대가 평양에 도착해 김일성을 도울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당시 쏘련의 모스크바가 북조선에 자신들의 말을 잘 듣는 정권을 세우기 위해 한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일은 세가지였습니다.
그 첫 번째가 북조선 정부의 지도자를 만들어 내세우는 것이고 두 번째는 공산당 세력이 주도권을 장악하도록 하는 것이며 세 번째는 첫 번째와 두 번째 과제를 수행할 력량을 보충해주는 것입니다.

이 세가지 중에서 첫 번째는 스딸린이 김일성을 만나보고 정했고 두 번째는 김일성을 공산당에 입당시키는 것이였습니다. 세 번째로 김일성과 군정강화를 위해 쏘련은 조선으로 내보낸 있던 조선인출신 군관과 간부들을 여러차례에 걸쳐 북조선 각지방에 파견했습니다.
이때 남일, 방학세, 허가이 등 거의 500여명에 달하는 쏘련공민증을 가진 조선인 출신 쏘련군관과 간부들이 1948년까지 북조선에 파견됐습니다. 1945년9월부터 쏘련군이 철수한 1948년 12월까지 김일성의 부관을 했던 문일은 쏘련군대의 군관을 하던 사람으로 쏘련군정이 붙여준 것이였습니다.

또한 8.15 해방직후 김일성이 평양에 도착한 직후부터 항상 함께 다녔던 강 미하일 소좌는 쏘련군정이 붙여준 정치담당 군관이였습니다. 쏘련군정의 정치적 명령과 지시를 전달해주고 김일성의 활동을 감시 하고 보좌해주는 역할을 맡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쏘련 군정의 정치적, 군사적 도움과 배경속에서 김일성은 평양에 들어오자 국내의 유명한 공산당 지도자들을 만납니다. 김일성은 처음에 국내에 있던 공산주의자 중 유명했던 김용범과 박정애, 오기섭 등과 만났습니다.
쏘련군정이 “김일성장군”이라며 적극적으로 내세워 주었기 때문에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 지도자들이 김일성을 만나준 것입니다. 처음에는 공산당 측에서 도급 책임자 부책임자들을 찾아가 만났지만 한달도 안돼 이들을 평양에 불러 공산당 창건을 위한 회의를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김일성이 북조선의 지도자, 공산당 창건의 역할을 하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은 쏘련에서 나와 전국으로 파견된 간부들이였습니다. 쏘련 군대와 당, 행정기관에서 간부로 있으면서 실력을 갖춘 쏘련출신 간부들은 김일성의 부하로서의 지위와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김일성은 정부수립과 공산당 창건에서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었고 중앙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김일성은 공식적으로 조선공산당의 책임적인 지위를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김일성이 북조선에서 조선공산당 창건 준비를 주도하게 되면서 1945년 10월 8일 서울에서 올라온 박헌영과 처음으로 만납니다. 박헌영과 김일성의 만남은 쏘련의 지시와 도움이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이날 김일성은 박헌영에게 당중앙의 위치는 당연히 공산당이 주도권을 잡은 해방지역인 북조선에 있어야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박헌영은 지역적 개념을 주장하며 당중앙은 서울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론쟁을 벌렸는데 로마넨꼬 소장이 나섰습니다. 쏘련군정 민정사련관인 로마넨꼬 소장은 박헌영에게 서울보다는 평양에 당중앙을 두는 것이 좋다고 하였지만 박헌영은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김일성과 박헌영 사이에 조선공산당 중앙을 놓는 문제를 놓고 다투던 중 쏘련군정까지 강력하게 평양을 주장하자 박헌영이 한발 물러났습니다. 박헌영은 그러면 조선공산당 중앙에 속하지만 북조선 지역을 지도할 수 있는 북조선 분국을 평양에 설치하자고 김일성과 합의를 했습니다.
이런 합의가 있었기 때문에 10월 10일부터 13일까지 평양에서는 공산당 북부지역 5도 당책임자 및 열성자대회를 열고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을 창설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조선로동당 창건 기념일이 됐는데 그러나 이때에도 조선로동당이 아닌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이였습니다.

1945년 10월 10일부터 3일간 진행된 이북 5도 당책임자 및 열성자 대회에는 약 180명 정도가 참가했는데 총비서는 김일성이 아니였습니다.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이 창설됐지만 총비서는 김용범, 제2비서에 오기섭, 무정이 됐고 김일성은 안길, 박정애 등과 함께 집행위원이였습니다.
김일성이 북조선 분국 총비서의 자리를 김용범으로부터 넘겨받은 것은 1945년 11월이였고 12월 17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제3차 확대집행위원회에서 '분국'의 명칭을 떼버리고 위원장이 됩니다. 그리고 나서도 몇차례의 과정을 거치는데 1946년 4월 제7차 회의에서 북조선공산당으로 이름을 바꾸고 남조선 공산당으로부터 독립합니다.

북조선 공산당은 1946년 8월 28일부터 30일까지 대회에서 중국에서 공산당활동을 한 연안파 출신들이 세운 조선신민당과 합당을 합니다. 이때 합당하면서 바뀐 명칭이 ‘북조선로동당’인데 조선신민당의 총비서는 김두봉으로 훗날 김두봉은 종파로 숙청됩니다.
북조선 로동당이 조선로동당으로 이름을 바꾸기 까지는 1949년까지 다시 3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였습니다. 이렇듯 해방이후 지금까지의 역사를 살펴보면 조선로동당이라는 이름이 독립적으로 나오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과 진통을 겪게 되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명한 사실은 1945년 10월 10일에 조선로동당은 결코 창건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상으로 조선로동당 창건기념일 특집 2회를 마지겠습니다.
다음시간에는 조선로동당 창건 과정에서의 김일성과 박헌영의 파벌싸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입력 : 2017-10-11 (조회 : 20)  |  북한개혁방송
Copyright ⓒ 북한개혁방송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