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후원안내

자유게시판

Home > RADIO >특집방송 > 기념일 방송

기념일 방송

[조선로동당 창건의 진실 4부작] 1회 조선로동당은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에서 분리된 정당이다

방송일 : 2017-10-10  |  진행 :  |  시간 :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하기
0:00:00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조선개혁방송은 공화국 창건 72주년을 맞아 조선로동당 창건의 진실을 알아보는 특집 프로그람을 준비했습니다.
오늘 첫 시간에는 8.15해방 직후 조선공산당 재건되었던 과정을 알아봅니다.

조선로동당 규약은 맨 처음에 “조선로동당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당이다.” 이어 조선로동당 규약은 김일성 주석이 창건했고 강화 발전시켰다고 적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선로동당 규약은 첫 문장부터 틀렸습니다.
그 리유는 당의 근본은 사람들의 집단을 말하는 것인데 당을 개인의 당이라고 규정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 잘못은 로동당은 김일성이 창건한 당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조선로동당은 김일성이 창건한 것이 아니라 박헌영이 재건한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이 신민당과 합당하여 탄생한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박헌영이 창건한 조선공산당과 김두봉이 조직한 조선신민당이 합당하여 생겨난 것이 바로 조선로동당입니다.
8.15 해방 직후 남북 조선 전 령토에서는 독립운동을 벌렸던 민족주의 애국자들과 공산주의 애국자들이 일제히 정부수립 활동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인민들이 해방의 기쁨, 새조국 건설의 꿈을 펼치는 활동이 자리를 잡기도 전에 북조선에는 쏘련이, 남쪽에는 미국이 들어왔습니다.

당시 서울과 평양에서는 미국과 쏘련이 들어오기 전에 이미 민족주의 세력과 공산주의 세력이 건국준비와 당창건을 위해 활동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왕이 라지오 방송으로 항복을 선언하자 당시 조선총독이였던 아베는 서울에서 유명인사였던 여운형을 만나 협상을 합니다.
이 협상에서 총독은 조선에 남아있던 일본인 생명 재산보호, 정치 경제범 석방 등 5가지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이 협상이 끝나자 려운형은 바로 다음날인 8월 16일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그 준비에 들어갔는데 공산당 측에서는 박헌영이 나섰습니다.

전라남도 광주의 방직공장에서 김성삼이라는 가명으로 일하던 박헌영은 해방 닷새전인 1945년 8월 10일 중요한 정보를 입수합니다. 그것은 바로 일본이 항복을 위해 미국 측과 협상을 하고 있다는 내용이였습니다.
8월 15일 일본이 패망을 선포하자 바로 서울로 올라와 함께 독립운동을 벌리던 공산주의자들과 만나 첫 모임을 가집니다. 다음날 박헌영은 이영, 최원택, 이승엽 등과 만나 1928년에 해체된 조선공산당 재건에 관해서 토론을 합니다. 이들은 재건파 조선공산당이라고 합니다.

다음날 서울 각지에는 서울지역 혁명가 대회를 한다는 벽보가 붙었는데 “근로대중의 위대한 지도자 박헌영 선생은 어서 나와 우리를 지도해달라”, “박헌영 동지여 어서 출현하라, 우리는 박동지를 기다린다.”등의 구호들이 나붙었습니다.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해 노력하는 가운데 박헌영은 8월 20일 <현 정세와 우리의 임무>라는 론문을 발표합니다. 이것을 가르켜 박헌영의 8월 테제라고 하는데 그 내용은 조국해방 당시의 조선의 정치 현실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올바른 과제를 제시한 것입니다.

박헌영은 <현 정세와 우리의 임무>에서 “오늘날 조선은 부르죠아 민주주의 혁명단계에 놓여 있다.”면서 과제를 제시했습니다. 박헌영은 정부수립을 해야 하며 토지개혁을 실시하고 8시간 로동제를 실시하며 산업국유화, 의무교육, 조선공산당의 역할 등을 제시했습니다.
당시 박헌영의 8월테제는 북조선에 진주했던 쏘련 군정이 참고할만큼 훌륭한 테제였고 이로 인해 박헌영은 쏘련군정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박헌영은 1900년 출신으로 충청남도 예산군에서 태여나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상해로 건너가 사회주의 활동을 했습니다. 박헌영은 1921년 고려공산청년동맹에 들어가 책임비서가 되었고 1922년 1월에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코민테른의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참가하였습니다.
이후 일제 경찰에 체포되여 감옥에도 몇 번 드나들었고 기자로 활동하다가 1925년에는 서울에서 조직된 조선공산당창립에 참가했습니다. 박헌영은 리론에 밝고 다양한 투쟁경험을 갖춘 공산주의 혁명가로 쏘련군정과 모스크바에서도 특별히 관심을 갖고 지켜본 사람이였습니다. 

박헌영이 8월 20일 8월 테제를 발표하고 조선공산당 창건 준비위원회를 만들고 위원장으로 선출됐습니다. 그러나 박헌영 중심의 조선공산당을 반대했던 서울지역의 토착 공산주의자들은 이영을 수반으로 하는 또다른 조선공산당을 창건합니다.
이영은 스스로를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총비서라고 부르며 세력을 모으고 박헌영과 대립하는데 이들을 장안파 공산당이라고 합니다. 박헌영의 재건파와 이영의 장안파가 서울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대립하는 가운데 이영은 북조선도 방문하면서 극좌적으로 나갑니다.

이런 과정에서 박헌영은 8월과 9월에 남조선 각 도에 도당위원회를 창설하고 “해방”, “공산당원”이라는 기관지도 발행합니다. 극좌적으로 나가다가 대중의 지지를 잃은 이영의 장안파 공산당은 얼마 되지 않아 박헌영의 재건파 공산당에 흡수되어 버리고 맙니다.
서울에서는 박헌영이 공산당 세력을 넓히고 있을 때 북조선에서도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이 맹렬한 활동을 벌렸습니다. 서울에서 박헌영이 가장 먼저 공산당을 창건했기 때문에 평양과 원산, 신의주 등에는 “박헌영 만세”라는 구호와 삐라가 많이 붙었습니다.

당시 공산당 조직이 가장 치열했던 곳은 함흥과 원산, 청진, 평양, 신의주 등지였는데 이 중에서도 오기섭이 가장 활발했습니다. 1903년 함흥에서 태여난 오기섭은 박헌영과 비슷한 시기에 공산주의 활동을 했으며 고려공산청년동맹에도 가입했었습니다.
1926년 3월에 조선공산당에 입당했고 13년동안이나 감옥에도 투옥되었던 정통파 국내 공산주의 자였습니다. 오기섭은 해방이 되자 1945년 9월 함흥에서 조선공산당 함경북도 창설위원회를 세우고 창설위원장이 되었습니다.

함흥에 오기섭이 있었다면 원산에는 이주하라는 열혈 공산주의자가 있어 1945년 8월에 이미 원산시 공산당 조직이 결성됐습니다. 이주하 역시 일제에 의해 체포돼 5년동안 감옥생활을 했는데 이런 열혈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1945년 10월에는 북조선의 5개 도에서 공산당 도당이 결성됐습니다.
이 과정에서 김일성이 독자적인 능력으로 조직한 공산당은 없었습니다. 김일성은 1945년 9월 19일 쏘련 군함 뿌가쵸브 호를 타고 원산항에 도착했기 때문에 김일성 중심의 공산당이 조직될 기초와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8.15 해방 직후 평양에는 현준혁이라는 유명한 젊은 공산주의자가 있었는데 그는 조선공산당 평안남도 지구 위원회 비서였습니다. 현준혁은 합리적인 공산주의자로 평양에서 큰 인기가 있었는데 평안남도 조선공산당에는 장시우라는 또다른 공산주의자가 있어 둘이 경쟁상태였습니다.
현준혁은 8월 26일 쏘련군에 평양에 들어와 군정을 세우는 상황에서도 민족주의 지도자 조만식과 협력관계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준혁은 1945년 9월 3일 조만식과 함께 삼륜차를 타고 평양의 종로거리를 지나다가 암살당합니다.

조만식과 현준혁이 타고 가던 삼륜차에 뛰여오른 괴한이 현준혁을 겨누고 권총을 발사했는데 현준혁은 그 자리에서 사망했습니다. 현준혁은 평양의 ‘대성산혁명렬사릉’에 안치돼 있는데 그가 암살된 것은 대립관계였던 장시우 파에 의해 암살당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이처럼 박헌영이 조선공산당을 창건하고 세력을 넓혀가던 1945년 8월과 9월 중순까지 김일성은 멀리 쏘련의 우스리스크에 있었습니다. 그러니 조선신민당과 공산당의 합당의 결과로 탄생한 조선로동당이 김일성이 창건했다거나 김일성의 당이라는 당 규약은 완전한 거짓인 것입니다.

이상으로 10월 10일 당창건 기념일 특집 첫 번째 시간을 마칩니다.
조선개혁방송의 경덕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입력 : 2017-10-10 (조회 : 65)  |  북한개혁방송
Copyright ⓒ 북한개혁방송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