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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일 방송

9.9절(정권수립기념일) 특집방송 : 3회 박헌영과 김일성에게 지도자 시험을 치른 스딸린

방송일 : 2017-09-11  |  진행 :  |  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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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딸린 북조선 지도자를 시험하다.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9월 9일은 북조선 공화국 창건기념일입니다. 조선개혁방송은 공화국 창건일을 맞아 공화국 창건의 력사적 진실을 알아보는 특집 프로그람을 준비했습니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 세 번째 시간으로 쓰딸린이 북조선의 지도자 후보를 시험 쳐서 결정했다는 사실을 밝혀봅니다.
1941년부터 쏘련 우수리스크에 있었던 김일성이 북조선의 지도자가 될 수 있은 것은 철저하게 쏘련군정의 지원과 도움 때문이였습니다. 동시에 쏘련 공산당 총비서이자 최고사령관이였던 스딸린의 승인과 지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그 진실을 파헤쳐 봅니다.
1945년 5월 9일 독일이 항복하자 미국, 영국, 쏘련은 독일의 포츠담에서 전후 독일의 처리문제를 론의했습니다. 7월 26일의 포츠담에서 발표한 공동선언은 일본의 항복을 권고하고 조선의 해방을 확인했습니다.
스딸린은 포츠담에서 미국, 영국 등 연합국이 극동전선에서 대일전쟁에 뛰여들 뜻이 없음을 알고 대일작전을 긴급하게 지시했습니다.
쏘련은 8월 9일 대일선전포고를 하고 만주와 조선으로 진격하면서 북조선 정권수립을 위한 실천에 들어갔습니다. 쏘련 제25군단은 8월 24일 평양에 들어와 군정을 설치하였는데 이때 이미 남조선 서울에서는 박헌영이, 평양에서는 현준혁, 함흥에서는 오기섭이 공산당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민족주의 지도자 조만식이 평양에서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고 신의주로는 중국에서 활동하던 애국자들이 귀국하고 있었습니다. 평양에는 건국준비위원회가, 함흥에는 서울, 평양, 함흥 등에는 유명한 공산당 지도자들이 있었지만 이들이 쏘련에 전적으로 협조하고 충성할지는 의문이였습니다.
평양의 정치상황을 그대로 방치하면 조만식을 지도자로 하는 민족주주의 세력이 정권을 잡을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이런 현실은 평양의 쏘련군정 사령부가 스탈린에게 보낸 ‘북조선 정세 보고서’에 낱낱이 반영됐습니다.
사태를 파악한 모스크바의 최고사령부는 극동 제25군단 치스챠코프 사령관에게 북조선 지도자감을 빨리 찾으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하지만 북조선 내에서는 당장 쏘련의 말을 고분고분 잘 듣고 대중의 지지를 받을만한 지도자감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다가 극동군 제25군단 사령부는 체까 극동지역 본부와 협의를 하다가 88정찰려단 제1대대장 김일성을 추천했습니다. 체까란 국가안전보위부와 같은 기관으로 쏘련의 10월 혁명 후에 만들어진 쏘련의 정보기관입니다.
김일성 후보로 추천된 것은 쏘련군대의 훈련과 교육을 잘 받았고 부대내에서 어느정도 인기가 있는데다가 려단장이였던 중국사람 주보중에게도 잘 보였기 때문입니다.
김일성이 후보로 선택됐다는 보고를 받은 스탈린은 극비밀리에 김일성을 모스크바로 보내라는 긴급 명령을 극동군사령부에 내려보냈습니다. 이렇게 해서 1945년 9월 초에 김일성은 조선으로 귀국하지 않고 모스크바로 날아갔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쏘련정부가 공개한 정부 문서와 1945년 당시 북조선 평양의 쏘련군정에서 핵심역할을 했던 사람들의 증언으로 밝혀진 것입니다. 김일성이 쓰딸린을 만나려 갔다는 사실은 당시 쏘련 극동군 총사령관 와씰리옙스키 원수의 부관으로 일본어 통역을 했던 꼬바넨꼬 이완 이와노위치가 1992년 5월 남조선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처음으로 공개했습니다.
군용 비행기를 타고 모스크바에 도착한 김일성은 곧바로 스탈린의 전용 별장으로 가서 스탈린을 만났습니다. 쓰딸린의 극비 지시로 김일성이 모스크바로 갔기 때문에 극동군 총사령부 내에서도 군사위원 치낀 상장 등 몇 명만 알고 있었다고 증언했습니다.
김일성을 만난 스딸린은 식사를 하면서 극동군 사령부에서 올려보낸 김일성 평가보고서를 보며 각종 질문을 했습니다. 쏘련군 대위 견장을 단 군복을 입고 있던 김일성은 너무나 긴장해서 쓰딸린의 질문에 무조건 네, 네 하는 답변만 하는 정도였습니다.
이 만남이 있고 나서 쓰딸린은 “주목할 필요가 있는 사람이다. 쏘련군정은 이 사람에게 적극 협력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스딸린의 면접시험에서 통과한 김일성은 북조선의 예비 지도자가 되어 1945년 9월 19일 쏘련군함 뿌가쵸브 호를 타고 원산항에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김일성이 북조선의 지도자로 확정된 것은 아니였습니다. 당시 북과 남이 분단되고 남조선에는 미국이, 북조선에는 쏘련이 진주해 있었고 평양의 정치정세는 아주 복잡했습니다.
특히 공산당 쪽 지도자로는 남조선 서울에서 활동하던 조선공산당 총비서였던 박헌영이 있었는데 경력과 사상리론이 아주 좋았습니다. 박헌영은 1921년 이르츠크파 고려공산당 상해 지부에 입당하여 고려공산청년동맹 책임비서가 된 사람으로 공산주의 운동을 오래했습니다.
박헌영은 해방된지 며칠만에 서울에 나타나 “현 정세와 우리의 과업”이라는 유명한 테제를 발표하고 곧바로 조선공산당을 재건했습니다. 8.15 직후 초기 박헌영은 서울에서 활동했는데 서울의 쏘련 령사관에서는 쓰딸린에게 보내는 보고서에서 박헌영을 북조선의 지도자 감이라고 추천했습니다.
당시 박헌영은 서울의 쏘련 령사관에서 체까 분야를 담당한 샤브신 부영사를 만나 자신의 경력과 리론 실력을 내세워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또 평양의 쏘련군정 정치위원 발라샤노브도 박헌영을 지지했습니다.
이렇게 되어 쏘련 극동군사령부에서는 김일성을 북조선 지도자 후보로 추천했고 쏘련 외무성과 체까에서는 박헌영을 지도자 후보로 추천했습니다.
박헌영과 김일성은 서로 지도자가 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렸습니다.
이 과정에서 박헌영이 1946년 5월 김일성과 쏘련군정에 대한 불만을 적은 편지를 쓰딸린에게 보냈습니다. 박헌영의 편지는 쏘련 극동군 체까에서 먼저 보고 극동군구 사령관을 거쳐 결국 쓰딸린에게까지 보내졌습니다. 편지를 본 스딸린은 “박헌영과 김일성을 내가 직접 만나볼테니 모스크바로 보내라”고 명령했습니다.
당시 쏘련 제25군단 정치위원을 했던 레베데프는 1991년 11월 5일 남조선 중앙일보 김국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스딸린이 김일성과 박헌영을 만난 사실을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쓰딸린 대원수가 김일성, 박헌영을 만나는 자리에 책임자로 참가했던 쏘련극동군구 사령부 군사위원 스티코프 상장과 로마넨꼬 소장은 평양으로 돌아와 나에게 당시 상황과 배경을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었습니다.
스티코프 장군은 하바롭스크에서 모스크바로 직행해서 스딸린을 찾아갔습니다. 크레물린 궁전에 들어가보니 스딸린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김일성, 왼쪽에 박헌영, 그리고 정면 중앙에 스티코프 장군, 그리고 좌우측에 평양 측의 로마넨꼬 장군과 서울 측의 샤브신 등이 앉았습니다.
스티코프는 자리가 까다로운 크레물린 궁전의 좌석배치를 보고 분위기를 단번에 짐작했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쏘련에서 제일 중요한 자리로 정해진 스딸린의 오른쪽에 김일성이 앉았다는 것입니다.”
이날 스딸린은 김일성에게는 “쏘련 군정의 협력을 받아 북조선의 쏘베트화 정책을 조기에 실현시키도록 투쟁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박헌영에게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 활동하는 동지의 혁명투쟁을 높이 평가한다”고 격려했습니다.
 
김일성에게는 지도자로서의 활동을 하고 박헌영에게는 열심히 노력하라는 뜻이였던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해서 김일성은 스딸린으로부터 두 번의 시험에서 충성심을 인정받아 북조선의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신탁통치와 1948년 북과 남의 정부 수립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이상으로 9.9절을 맞으며 북조선 정권수립의 진실 두 번째 시간을 마칩니다. 지금까지 조선개혁방송의 경덕현이었습니다.
다음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입력 : 2017-09-11 (조회 : 16)  |  북한개혁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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