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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일 방송

9.9절(정권수립기념일) 특집방송 : 4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는 누구에 의해 세워졌는가

방송일 : 2017-09-12  |  진행 :  |  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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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9월 9일은 북조선 공화국 창건기념일입니다. 조선개혁방송은 공화국 창건일을 맞아 공화국 창건의 력사적 진실을 알아보는 특집 프로그람을 준비했습니다.
 
오늘은 9.9절 특집 마지막 시간으로 1945년 8.15 이후 강요된 강대국의 신탁통치와 북과 남의 정부수립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북조선 역사는 8.15 해방 후 김일성이 주체적으로 림시정부를 구성하고 남북연석회의도 해서 정부를 수립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김일성이 없었다면 북조선 정부는 수립되기 어려웠다는 것인데 사실은 정 반대입니다.
북조선에서 지도자로서 활동하던 김일성은 군정국인 쏘련이 요구대로 신탁통치에 적극 찬성했던 것입니다. 신탁통치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연합, 즉 유엔의 위임을 받은 나라가 자체로 국가를 운영할 능력이 없는 지역을 통치하는 것입니다.
1945년 7월 22일 독일 베를린 시회의 포츠담에서 열린 미국(트루먼), 영국(처칠), 소련(스탈린) 등 3국 정상회담에서 조선의 운명이 결정됐습니다. 다음날인 7월 23일 발표된 ‘포츠담 선언’은 “조선이 적당한 시기에 독립되어야 한다”는 ‘카이로 선언’의 내용을 재확인했습니다.
이후 8월 14일 미국은 38도선을 경계로 북에는 쏘련이 남에는 미국이 진주하는 계획을 쏘련측에 전달했고 다음날 쏘련은 미국 제의를 승인했습니다. 3.8선이 생겨나고 몇 달 지난 1945년 12월 16일부터 25일까지 모스크바에서는 미국, 영국, 쏘련의 외무상 회의가 열렸습니다.
모스크바 3상 회의라는 이 회의에서 합의되어 27일 발표된 것이 바로 조선에 미국과 쏘련이 공동위원회를 설치하고 신탁통치를 한다는 것입니다. 신탁통치의 핵심은 쏘련과 미국이 북과 남을 분리해서 통치한다는 것으로 신탁통치가 되면 조선은 자주독립국가가 될 수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북과 남에서는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운동이 격렬하게 벌어졌습니다. 북과 남의 민족주의자든, 공산주의자든 모두가 일제 식민지에서 해방되어 자주독립국가를 열망했기 때문에 신탁을 반대했습니다.
신탁통치가 발표되자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 산하의 지방 군당 조직들에서도 신탁통치 반대 주장이 나왔습니다. 조선공산당 총비서였던 박헌영은 신탁통치가 발표된 바로 그날 새벽 38선을 넘어 북조선으로 들어왔습니다. 박헌영이 없는 서울에서는 조선공산당 핵심간부들도 신탁통치를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비밀리에 평양에 들어갔다가 5일만인 1946년 1월 2일 서울로 돌아온 박헌영은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쪽으로 돌아섰습니다. 서울의 조선공산당은 “신탁통치는 일제의 침략과는 다른 것”이라며 “민족이 통일하여 5년이라는 기간을 단축하자”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미국측과 맞서면서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려 했던 남조선은 신탁통치 반대로 더욱 들끓었습니다. 상해림시정부를 이끌었던 민족주의지도자 김구가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이끌었고 1946년 1월에는 리승만도 함께 했습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서 쏘련과 미국은 북과 남을 맡아서 통치한다는 신탁통치 기간은 최고 5년으로 정했습니다. 이 때문에 북과 남에서는 일제히 “또 5년간 남의 노예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라며 격렬한 반대운동을 벌렸지만 공산당은 “쏘련은 후견제”라며 찬성했습니다.
후견제란 능력이나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에 뒤를 돌보아 준다는 것인데 표현이 다를뿐 내용은 같은 것이였습니다. 미국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신탁통치 반대투쟁이 격렬하게 벌어진 남조선과 달리 쏘련군정의 꼭두각시인 김일성은 신탁통치를 무조건 찬성하는 쪽이였습니다.
쏘련군정 민정사령관 로마넨꼬 소장이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12월 30일 김일성과 박헌영을 만나 쏘련의 후견제 립장을 통보했기 때문입니다. 같은 날 쏘련군정 사령관 치스쨔꼬브 대장은 자신의 사령관실로 조만식을 불러 신탁통치 찬성을 요구했습니다.
평양에서 신탁통치 반대투쟁의 앞장에 선 사람은 북조선에서 가장 인기있는 민족주의 지도자 조만식이였습니다. 치스쨔꼬브는 모스크바 삼상회이 결정을 알려주면서 신탁통치가 5년이 조선을 독립국가로 만드는 지도기간이 된다고 하면서 찬성을 강요했습니다.
하지만 조만식은 신탁이든 후견이든 다 같고 같은 것이라며 결사반대한다는 립장이였습니다. 치스쨔꼬브 사령관을 만나고 돌아온 조만식은 밤새 당의 지도자들과 토론 끝에 “민족의 대의를 위해 끝까지 싸우기로 결의”했습니다.
이틀후인 1946년 1월 2일 당중앙위원회를 소집해 신탁통치를 절대 찬성할 수 없다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치스쨔꼬브에게 공식 통보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쏘련군정은 매일 같이 김일성과 최용건, 로마넨꼬 소장, 이그나찌브 대좌 등을 조만식에게 보내 신탁통치 찬성을 강요했습니다.
쏘련군정은 신탁통치를 찬성하면 김일성을 군대 사령관, 조만식을 초대 북조선 대통령으로 모시겠다고까지 제의했으나 조만식은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쏘련으로서는 북조선에 복종적인 사회주의 괴뢰 정부를 수립하려면 신탁통치가 결정적으로 유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때문에 쏘련은 김일성을 내세워 북조선에 괴뢰정부를 수립하는데 모든 역량을 집중했고 후견제라는 미명하에 신탁통치 찬성을 강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미국이 진주한 남조선에서는 미국이 주도한 신탁통치 반대운영이 극도로 격렬했지만 북조선은 온통 찬성분위기였습니다.
쏘련의 점령통치나 다름없는 후견제라는 면사포를 뒤짚어쓴 신탁통치 찬성에 가장 앞장선 것은 바로 김일성이였습니다.
당시 김일성의 정치담장 쏘련군 장교였던 레베데프 소장은 1991년 6월 11일 남조선 중앙일보 김국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조만식을 만나고 온 김일성이 ‘이 기회에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고집쟁이 영감을 죽여버리자’고까지 건의했으나 이는 혁명과정에서 폭탄을 안고 가는 것과 같다는 리유로 모두 반대했습니다.”
1946년 1월 3일 평양시에서는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북조선 공산당의 시위행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이틀 뒤인 1월 5일 쏘련군정의 강요로 조만식은 평양 인민위원회 의장직을 사임했고 며칠 후에는 쏘련군정에 의해 호텔에 감금되었습니다.
신탁통치를 두고 서로 립장이 달랐던 미국과 쏘련은 갈등이 심화되었고 1947년 5월 21일을 끝으로 쏘미 공동위원회는 끝나고 말았습니다. 이후 남조선에서는 1948년 5월10일부터 5.10일까지 유엔의 감시하에 총선거를 실시하여 리승만을 대통령으로 하는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합니다.
그리고 남조선의 정부수립을 지켜보던 쏘련군정과 김일성은 3개월이 지난 1948년 8월 25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실시합니다. 이렇게 하여 9월 9일에 김일성을 수상으로 하는 조선민주주의공화국이 수립됐습니다.
이처럼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한 이후 조선은 쏘련과 미국에 의해 분단되었고 북조선은 철저한 쏘련군정의 통치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쓰딸린에게 시험까지 쳐서 충성심을 인정받아 합격된 김일성이 쏘련군정의 지도하에 북조선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결코 김일성이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활동으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수립한 것이 아니였던 것입니다. 아직은 북조선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김일성과 김정일이 왜곡한 력사의 진실이 밝혀지게 될 것입니다.
이상으로 9.9절을 맞으며 북조선 정부수립 특집 방송을 마칩니다.
지금까지 조선개혁방송의 경덕현이었습니다.
입력 : 2017-09-12 (조회 : 51)  |  북한개혁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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