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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일 방송

9.9절(정권수립기념일) 특집방송 : 2회 1945년 가을, 평양의 정치정세와 반대파 숙청

방송일 : 2017-09-08  |  진행 :  |  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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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9월 9일은 북조선 공화국 창건기념일입니다. 조선개혁방송은 공화국 창건을 맞아 공화국 창건의 력사적 진실을 알아보는 특집 프로그람을 준비했습니다.
오늘은 지난 주에 이어 두 번째 시간으로 8.15 해방당시 평양의 정치정세와 쏘련군정과 김일성의 반대파 숙청에 대해 알아봅니다.

북조선의 력사는 김일성의 항일투쟁으로 1945년 8월 15일에 일제가 패망하면서 조선이 독립된 것으로 시작합니다. 하지만 조선은 김일성에 의해 해방된 것이 아니라 미국과 소련에 의해서였습니다.

미국은 1945년 8월 6일에는 히로시마, 9일에는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여 일본을 항복시킵니다. 두 번째 원자탄이 나가사키에 투하된 그날 쏘련은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150만명의 병력으로 만주와 조선으로 진격합니다.

이렇게 해서 쏘련은 1945년 8월 17일 웅기, 나진, 청진항을 점령하였고 24일에는 평양에 진주합니다. 이때까지도 김일성은 쏘련의 반대로 조선해방전투에 참가하지 못하고 쏘련 우스리스크 지역에서 놀고 있었습니다.

8월 15일 일본 천황이 라디오 방송으로 항복을 선언한 후 다음날 서울에서는 려운형의 지도하에 건국준비위원회가 조직됐습니다. 또한 8월 17일 평양에서도 20명의 민족주의 지도자들이 모여 조만식을 위원장으로 하는 평양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했습니다.

소련은 공산주의가 아닌 조만식이 주도하는 민족주의가 대세를 이루자 1945년 8월 24일 평양에 들어와 군정을 설치하고 본격적으로 정치에 개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쏘련군정은 평양에 들어온지 3일만에 조만식에게 요구해 평양건국준비위원회를 민족주의 지도자 16명, 공산주의 지도자 16명이 참가하는 평양인민정치위원회로 개편했습니다.

동시에 민족주의세력을 차단하고 김일성을 내세우기 위해 쏘련의 조선인 출신 군관과 간부들을 끌어왔습니다. 8월 26일부터 29일사이에 쏘련 정부와 군대에서 군관과 간부를 하던 방학세 등 10명이 1차로 평양에 들어왔고 11월에는 50여명이 들어왔습니다.

이후 1949년까지 약 427명의 쏘련군 출신 조선인 군관과 간부들이 북조선으로 들어왔습니다. 이들은 모두 쏘련군정이 내세운 김일성을 도와 쓰딸린과 쏘련의 의도에 맞는 정부를 세우기 위해 활동했습니다.

김일성은 9월 19일에야 소련군함 푸카초프호를 타고 원산항에 상륙했습니다. 북조선의 공식적인 기록은 이보다 20일이나 더 늦습니다.

이후 1945년 9월 30일 평양시내 일본식 료정인 화방에서 조만식과 김일성이 만났습니다. 당시 김일성은 “선생님, 김일성입니다.”라고 하면서 조만식에게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조선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주장했던 조만식은 쏘련군정이 내세우는 김일성을 반갑게 맞지 않았습니다. 이후 김일성과 조만식은 몇차례 더 만났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정치적 립장은 더 첨예하게 대립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자 김일성은 청년들을 시켜 조만식을 체포했으나 쏘련군정의 정치담당인 메크레르 중좌에 의해 석방되기도 했습니다. 쏘련군정은 어떻게 하나 조만식을 포섭하려 했지만 조만식은 “쏘련군은 해방군인가, 점령군인가”며 조선의 정부수립에 개입하지 말 것을 주장했습니다.

원래 조만식은 1945년 10월까지만 해도 쏘련군정에 협조적이였습니다. 쏘련군정의 요구로 10월 14일 김일성 환영연설 준비위원장도 맡았던 조만식이 쏘련군정을 반대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은 쏘련이 점령군으로 군림하면서 조선의 자원과 설비를 약탈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쏘련군정은 9월말까지 중앙과 지방의 군까지 인민위원회라는 행정기구를 설치했습니다. 쏘련군정이 조직한 인민위원회 요직에는 쏘련 군정 편의  군관, 간부들이 차지했습니다.

쏘련군정은 군정통치를 확고하게 만들기 위해 10월 8일 평양에서 북조선 5도 대표자회의를 열고 ‘5도 인민위원회 협의회’를 조직했습니다. 조만식은 쏘련군정의 요구로 위원장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1945년 9월과 10월에 쏘련군대가 북조선의 공장설비, 특히 수풍발전소 발전기를 뜯어가자 조만식은 분노했습니다. 정치적으로도 자주를 강조하는 민족주의 립장이였던 조만식은 공산주의적인 쏘련군정과 정치적으로 대립이 심해졌습니다.

북조선 인민과 국내의 정치정세도 점령군으로 군림하면서 약탈까지 해대는 쏘련군정을 보면서 공산주의 보다는 민족주의로 기울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1945년 10월 15일, 쏘련 제35군 사령부에 모임 쏘련군정은 공산주의를 내세우지 말고 민족, 민주진영을 포섭하는 전략을 세웠습니다.

이런 전략에 따라 1945년 10월 20일 김일성이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로 찾아가 조만식을 만났습니다. 이 자리에서 김일성은 “선생님, 공산당도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으니 선생님을 지지하는 대중을 모아서 좋은 정당을 조직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쏘련의 희망입니다. 저도 도와드리겠습니다.”라고 간청했습니다.

분단상황에서 반목과 질시를 걱정하면서 거족적인 입장이였던 조만식은 김일성의 간청을 받아들여 조선민주당 창당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조만식을 당수로 하는 창당 준비가 거의 끝날 무렵 김일성은 약속을 어기고 자기 대신 최용건과 김책을 내세우자고 하는 바람에 조만식이 의심을 품었습니다.

김일성은 12월에 열릴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 제3차 확대집행위원회에서 책임비서였던 김용범의 자리를 넘겨받기로 돼 있었던 것입니다. 조만식에게 정당설립을 제안한 것은 조만식 회유 무마용이였던 것입니다.

이를 계기로 조만식과 김일성은 완전히 결별하게 됩니다. 당시 쏘련군정은 새로 수립될 북조선 정부의 대통령 자리까지 제시했지만 조만식은 끝내 거부했습니다. 결국 조만식은 1945년 11월 3일 공산주의 반대, 신탁통치 반대를 리념으로 하는 기독교 중심의 조선민주당을 창당합니다.

조만식이 독자노선으로 나가자 쏘련군정과 그의 지시를 받는 김일성과 인민위원회는 조만식을 반동으로 몰아 1946년 1월 체포되게 됩니다. 조만식의 체포로 북조선에서 민족주의 세력은 와해되기 시작했고 뒤이어 중국에서 귀국한 연안파 독립운동가들도 숙청되기 시작했습니다.

1945년 10월 12일 신의주 동 중학교에는 천여명 정도의 조선의용군 선발대가 귀국했으나 쏘련군대에 의해 무장해제 당했습니다. 또한 1945년 12월 초 김두봉, 무정, 최창익 등의 70여명 정도의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소위 연안파가 평양에 도착했지만 아무런 환영도 받지 못했고 훗날 6.25 전쟁과 1950년대 반종파 투쟁으로 모두 숙청됩니다.

결국 쏘련군정은 자신들이 검열하고 쓰딸린의 시험까지 통과한 김일성을 내세워 1948년 북조선 정권을 수립하게 되는 것입니다.

북조선의 혁명력사는 김일성이 8.15 해방도, 정부수립도 모두 혼자서 다 하고 인민들이 열렬히 지지한 것처럼 떠들지만 완전한 거짓입니다. 김일성은 1945년 9월 19일 원산항으로 귀국해 조용히 평양으로 들어가서 쏘련군정의 도움으로 권력을 잡고 국내 애국세력을 숙청하고 정권을 강탈했습니다.

이상으로 9.9절을 맞으며 북조선 정권수립의 진실 두 번째 시간을 마칩니다.
지금까지 조선개혁방송의 경덕현이었습니다.
다음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입력 : 2017-09-08 (조회 : 79)  |  북한개혁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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