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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일 방송

9.9절(정권수립기념일) 특집방송 : 1회 북조선에 세워진 소련군정과 김일성의 뒤늦은 귀국

방송일 : 2017-09-08  |  진행 :  |  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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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9월 9일은 북조선 공화국 창건기념일입니다. 조선개혁방송은 공화국 창건을 맞아 쏘련과 중국이 공개한 력사적 자료들과 사실을 토대로 북조선 정부 수립 과정의 진실과 김일성의 행적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북조선에서는 쏘련군의 진주가 아니라 김일성이 조선해방 진공작전을 진두에서 지휘해 북조선을 해방시킨 것처럼 선전하고 있습니다. 특히 김일성의 항일무장 투쟁만으로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여 조국해방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고 떠들어 댑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에 의하면 1945년 김일성의 조국해방 투쟁은 모두 조작된 거짓으로 밝혀졌습니다.

북조선은 김일성의 항일투쟁은 1939년 소할바령 회의 이후로 소부대공작으로 전환했다는 식으로 선전합니다. 하지만 당시 김일성은 소부대공작활동이 아니라 관동군의 토벌을 견디지 못하고 1940년 10월에 쏘련으로 들어갑니다.

일종의 도피였는데요, 이듬해인 1941년에 김일성과 김정숙 사이에서 태여난 아들이 바로 김정일로 당시 이름은 소련식으로 유라였습니다. 쓰딸린의 명령에 의해 조선인들과 중국인들로 구성된 쏘련군 제88정찰려단 1대대 대대장에 임명된 김일성은 대위였습니다.

쏘련 극동군 제88정찰려단장은 김일성 회고록에도 나오는 중국 사람인 주보중이였는데 쏘련군의 명령과 지시를 받아 활동했습니다. 김일성이 속한 제88려단의 목적은 1945년 8월 24일, 려단장 주보중 대좌가 소련 극동군 와실리옙스끼 총사령관에게 보낸 긴급 보고서에 잘 나타납니다.

주보중 려단장은 "제게 위임된 제88 정찰여단은 1942년 6월 스탈린 동지의 직접 지시에 따라 창설됐습니다. 중국 동지들 대부분은 만주에서 일본 강점자들에 맞서 빨치산 운동에 참가한 지도자들입니다. 여단은 이들 지역에서 군사·정치 전문가를 양성하고 있습니다."고 보고했습니다.

북조선에서는 88정찰려단이 김일성 부대인것처럼 조작하여 독자적으로 항일투쟁을 한 것처럼 선전하는데 사실이 아닙니다. 쏘련 극동군 88정찰려단은 철저하게 쏘련군의 결정과 명령에 복종했고 소련지역의 조선인과 중국인 공산당 조직과 주민들의 동향 파악을 했습니다.

쏘련은 1945년 8월 8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극동지역에서 군사작전을 시작해 8월 18일에서 22일까지 공격을 펼쳐, 원산, 함흥, 라진항을 점령했습니다.

쏘련군이 남진하여 8월 24일에는 평양, 28일에는 신의주에 진주했습니다. 평양시를 점령한 쏘련 극동방면군 제25군으로 사령관 치스쨔꼬브 대장은 8월 25일 ‘북조선 주둔 최고사령부’를 설치하고 포고문을 발표했습니다.

이때 수립된 소련 군정은 1945년 8월부터 북조선 정부가 수립된 1948년 12월까지 실시됐습니다. 치스챠꼬브 사령관이 지휘하는 쏘련군정은 김일성을 내세우고 북조선 정부 수립도 지원해주었던 것입니다.  

원래 1945년 8월 평양에는 쏘련군이 진주한 8월 24일보다 일주일이나 앞선 8월 17일에 이미 평양건국준비위원회가 수립돼 있었습니다. 당시 국내에서 유명한 독립운동가였던 조만식이 위원장으로 하는 20여명의 민족주의독립운동가들이 ‘평양건국준비위원회’ 위원이였습니다.

이처럼 평양에서 정부수립 활동이 활발했지만 김일성이 평양에 나타난 것은 보름이나 더 지나서였습니다. 김일성은 9월 19일 소련 군함 ‘푸카조프’호를 타고 다른 70여명의 조선사람들과 함께 원산항으로 귀국했습니다.

1945년 5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쓰탈린은 조선이 분할되고 쏘련군이 북조선에 주둔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극동군 정치부와 체까에 38도선 이북의 지도자감을 찾으라고 지시했습니다. 이때 88정찰여단 대대장이였던 김일성이 가장 눈길을 끌었다고 합니다.

쏘련군 극동군 총사령관 와실리옙스끼 원수의 부관을 지낸 꼬바렌꼬는 “김일성이 북조선에 귀국하기 보름전인 1945년 9월 초순 쓰탈린이 김일성을 비밀리에 모스크바로 불러 크렘린궁과 별장에서 단독으로 만나 그를 북조선의 최고 지도자 후보로 정한 후 그를 믿고 평양에 보낸 것입니다”고 증언했습니다.

쏘련은 북조선의 지도자를 고르는 동시에 북조선에 수립될 정부의 형태에 대해서도 고민했는데 쏘베트 식이 아니었습니다. 1993년 3월 26일 남조선 김영삼 대통령이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보리스 엘친 대통령의 소련정부는 수많은 조선관련 극비문서들을 공개했습니다.

이때 공개된 극비문서에는 1945년 9월 20일 스딸린이 와실리옙스끼 극동전선총사령관에게 보낸 명령서가 있는데 북조선 점령에 관한 7개 항목이 있었습니다.

명령서에는 북조선에 소베트 정권을 설립하지 말 것, 부르죠아 민주정권 형식의 정부를 수립할 것, 북조선 인민에게 소련군정은 일본을 내쫒기 위해 진주한 것, 쏘련군정이 북조선을 보호하는 것 등 이었습니다.

이처럼 1945년 10월 14일 김일성의 평양시 공설운동장에서 개선연설을 하기 전까지 김일성이 한 역할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김일성이 평양공설운동장에서 환영연설을 하기 바로 이틀 전인 1945년 10월 12일 소련군정 최고 사령관 치스챠꼬브는 포고문을 공표하였습니다.

치스챠꼬브가 공표한 포고문에는 “붉은 군대는 무슨 목적으로 조선에 왔는가”라는 제목의 게시문 형태로 발표되였습니다. 이어서 곧바로 소련 군정인 제25군 사령관의 명령서 제7호가 발표되였습니다.

명령서 7호에는 북조선에서 8.15 이후에 수립된 각 정당 단체들은 지방자치기관과 소련군정 경무국에 정관과 명단을 등록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또한 무장부대는 해체하고 무기를 바칠 것도 요구하는 등 완전한 군정체제로 돌입했습니다.

소련군정의 포고문과 명령서가 발표된 바로 이틀후인 10월 14일 김일성이 개선연설을 했는데 소련군정의 철저한 계획에 의한 것이였습니다. 당시 김일성이 연설하는 주석단에는 소련군정 사령관을 비롯해 소련군 장령들이 참석했고 조선 국기인 태극기와 쏘련 깃발이 설치됐습니다.

당시 공설운동장에 있었던 평안남도 양덕이 고향인 남조선 전 평안남도지사 박인각씨는 “연설에 앞서 점령군사령관이 그를 김일성장군이라고 소개했으나 참석했던 사람들은 33세의 젊은 김성주가 김일성 장군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고 밝혔습니다.

당시 원산인민위원회는 쏘련군 사령부에 전화를 걸어 “김일성 장군은 없다”고 하자 쏘련 사령부는 “김성주가 바로 김일성이다”라고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그때까지 김일성은 김성주라는 이름을 썼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양에서는 김일성 중심의 정부수립 활동이 힘을 쓰지 못했습니다. 평양에서는 10월 8일 각당, 각정파들이 모여 ‘이북 5도 임시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28일에는 ‘북조선 5도 행정국’을 설치했습니다.

이렇게 되어 쏘련 군정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는 정부수립작업이 펼쳐졌습니다. 그렇게 해서 1945년 11월, 북조선 전 지역대표 1,157명이 참석해 대의원 237명을 선출, 북조선인민회의를 구성한 뒤 1946년 2월 8일 제1차 회의를 열고 위원장에 김일성, 부위원장을 김책과 홍기주로 하는 22명의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출범시켰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북조선 정부수립은 김일성이 위대한 혁명가이고 수령으로서 주체적으로 혼자 이룬 것이 아니었습니다. 쏘련의 스딸린에 의해 검열되고 선택되어 북조선에 들어와 지도자로 내세워졌습니다.

다시 말해 쏘련의 괴뢰가 되었기 때문에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는 임시정부를 쏘련군정이 만들어 준 것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평양의 정치정세와 김일성의 반대파 숙청과정 등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상으로 9.9절을 맞으며 북조선 정권수립의 진실 첫 번째 시간을 마칩니다. 지금까지 조선개혁방송에 경덕현이었습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입력 : 2017-09-08 (조회 : 38)  |  북한개혁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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