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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일 방송

[6.25특집강좌] 5회 - 인천상륙작전과 “월미도 방어전투”의 진실은 무엇인가?

방송일 : 2017-06-25  |  진행 :  |  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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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요?
전쟁과평화연구소장 최용호입니다.
오늘은 6·25전쟁 특집 다섯 번째 시간으로 인천상륙작전과
“월미도 방어전투”의 진실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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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던 1950년 9월 15일 새벽엔 남쪽으로부터 세차게 몰아치던 태풍이 그쳤습니다. 간간이 비가 내렸지만 작전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7만5천명의 상륙병력을 탑승시킨 261척 수송선단의 선두가 일본의 요코하마 항을 출발한 것은 9월 12일이었습니다. 함대의 후미가 부산에서 출발해 제주도 서남쪽에서 합류한 것은 9월 13일 밤, 그리고 인천의 외항에 도착한 것은 14일 밤이었습니다.
 9월 15일 새벽 2시가 되자, 상륙작전을 시작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19척의 선두함대가 비어수로(飛魚水路)를 따라 인천항의 월미도를 향해 전진했습니다.
월미도의 등대는 불을 밝혀 함대를 유도하고 있었습니다. 이틀 전인 13일부터 계속된 치열한 공중폭격으로 월미도는 불타고 있었으며, 온통 화약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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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5시가 되면서 날이 밝았습니다. 그때는 각 함정들이 지정된 위치에 도착해 월미도를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작전은 별다른 지장이 없이 예정대로 진행되었습니다. 호위함에서 날아온 8대의 항공기가 제방 위에 있는 북조선군의 장갑차량을 폭격한 후 섬 전체를 폭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연이어 계속되는 폭격으로 벌집이 되어버린 월미도 해안에서 돌연 북조선군의 해안포가 사격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유엔군 항공기와 함포가 기다렸다는 듯이 해안포를 제압해 버렸습니다.
6시 27분, 17척의 상륙함이 월미도 해안을 향해 일제히 진격했습니다. 3분만인 6시 30분 상륙함이 해안에 도착하자 정지하지 않고 곧바로 월미도 내륙으로 진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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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에서 북조선군의 저항은 미약했습니다. 그러나 내륙의 동굴에 은거하고 있던 북조선군의 저항은 강력했습니다. 투항하는 병사도 있었지만, 악착 같이 버텼습니다. 뒤따라 보병들을 태우고 상륙한 도자 땅크가 동굴 입구를 차례로 봉쇄해 생매장시켜 버렸습니다.
화염방사기가 부착된 땅크는 동굴에 불기둥을 발사했습니다. 수많은 동굴 하나하나에 대한 전투는 예상외로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결국 8시경 월미도의 북조선군은 완전히 제압되었습니다.
월미도에는 북조선군 제64해안보병연대와 제226해안포병대대의 400여명이 방어하고 있었습니다. 이들 중 108명이 사살되고, 136명이 포로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100여명 이상이 동굴 속에 생매장 된 셈입니다.
136명의 포로들은 3일간에 걸친 치열한 폭격으로 대부분 전쟁공포증에 걸려 있었습니다. 남조선군과 유엔군의 피해는 17명으로, 대부분이 상륙작전 초기 해안으로부터 기관총 사격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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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서 1단계 상륙작전 즉, 월미도점령은 성공적으로 완수되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썰물 즉 바닷물이 빠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함대는 해안에서 멀리 물러났습니다. 월미도에 상륙한 해병대는 북조선군의 지역에 고립되고 말았습니다.
만약 북조선군이 대병력을 동원해 월미도를 공격 한다면 월미도에 상륙해 있던 유엔군 해병대는 위기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유엔군은 바닷물이 다시 들어오는 저녁의 만조 때까지 추가병력을 상륙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북조선군이 인천으로 증원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함재기들이 출동했습니다. 인천을 중심으로 반경 40㎞ 지역의 도로를 맹폭격했습니다. 도로상의 교량은 모조리 파괴되고, 도로는 곳곳에 웅덩이가 만들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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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4시 45분, 다시 만조가 시작되자, 유엔군의 상륙 엄호사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어 주력부대가 월미도 건너편의 해안과 송도 부근 해안으로 상륙했습니다. 그들은 9월 16일 새벽까지 인천시가지를 장악하고, 시내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던 북조선군을 제압했습니다.
작전은 서울방향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주력부대가 동쪽으로 진격하면서 9월 18일 아침에는 김포비행장을 점령했습니다. 19일 밤에는 영등포 외곽까지 진출했습니다.
 후속부대로 해상에서 대기 중이던 미 제7사단은 9월 17일부터 상륙을 시작해 수원?오산 방향으로 진출해 9월 28일 낙동강에서 반격하는 부대와 연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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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 원수는 6.25전쟁이 시작된 직후 6월 29일 한강방어선을 시찰하면서 처음으로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했다고 합니다. 맥아더 원수는 북조선군의 격멸을 위해 “병참선의 요충인 서울을 측방에서 기습 공격함으로써, 북조선군의 보급로와 후방을 차단해 전세를 일거에 뒤집는 대담한 작전이 필요하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북조선군의 공세가 워낙 강력해 7월과 8월에는 상륙작전을 실행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전세의 악화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신념을 가진 맥아더 원수는 인천상륙계획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확신은 깊어만 갔습니다.
사실 인천상륙은 미 합참뿐만 아니라 그의 참모들조차 반대할 만큼 불리점이 더 많은 곳이었습니다. 미 합참의 반대 이유는 크게 다섯 가지로입니다.
 첫째, 인천은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9m나 되어 상륙시간이 극히 제한된다.
 둘째, 낙동강 방어선과 거리가 너무 멀어 각개격파 위험이 크다.
 셋째, 원거리 상륙으로 상륙용 선박이 부족하다.
 넷째, 상륙병력 선발시 병력 부족으로 낙동강 방어선이 위험해진다.
 다섯째, 상륙병력 선발로 일본방어의 공백이 발생한다.
등이었습니다.
맥아더는 이 같은 합참의 반대에 대해 “인천상륙작전은 바로 이 같은 이유로 인해 방심하는 적을 기습 할 수 있으며, 반드시 성공하게 될 것이고, 10만여 명의 생명을 구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라고 강조했습니다. 결국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맥아더를 군신의 반열에 올려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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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김일성의 대비는 어떠했을까요?
미 합참의 우려와 같이 인천상륙작전은 제한사항이 많은 작전이었습니다. 그러나 맥아더의 주장과 같이 김일성의 방심이 결정적이었습니다. 그해 8월 초 중국의 모택동은 김일성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했습니다.
“북조선군이 낙동강에서 한걸음도 나가지 못하고 있는 것은 국군과 유엔군의 새로운 반격에 직면해있기 때문이다. 그 반격은 상륙작전 형식이 될 것이며, 상륙지역은 인천이 될 것이고, 그 시기는 조수간만의 차이를 살펴볼 때 9월 중순이 될 것이다. 따라서 북조선군은 군대를 과감하게 후퇴시켜 방어로 전환해야 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모택동의 예측은 정확했습니다. 그러나 승리의 환상에 취해 있던 김일성은 모택동의 충고를 일축했습니다. 오히려 서울방어를 위해 남겨두었던 예비부대까지 모조리 낙동강전선으로 투입했습니다.
김일성이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징후를 알아차린 것은 유엔군의 함정이 인천 앞바다에 출현하기 시작한 9월 13일이 이후였습니다. 김일성은 9월 14일 서울에 남아있던 제18사단 제22연대를 인천으로 급파했지만 도로가 모두 파괴되어 제22연대가 인천에 도달하기 전에 인천이 점령되어 버렸습니다.
결국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맥아더의 신념과 김일성의 방심이 만들어 낸 작품입니다. 승리의 환상에 취한 김일성이 모택동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은 결과인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전쟁과평화연구소장 최용호였습니다.
입력 : 2017-06-22 (조회 : 76)  |  북한개혁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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